뇌전증은 뇌 특정 부위의 신경세포가 갑자기 흥분해 발작을 일으키는 질환이다. 뇌에서 전선이 합선돼 스파크가 발생하는 것과 같다./NewYork-Presbyterian Hospital

홍승봉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뇌전증지원병원 협의체 위원장)는 요즘 미국 신경과 의사를 통해서 국내 뇌전증(간질) 환자에게 신약을 처방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찾고 있다. SK바이오팜이 개발한 뇌전증 신약 ‘세노바메이트(성분명)’ 얘기다.

세노바메이트는 지난 2019년 11월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고 이듬해 5월 현지에서 엑스코프리라는 제품명으로 정식 출시됐다. 2021년 유럽에서도 온투즈리라는 이름으로 출시됐다. 하지만 아직 국내 허가는 받지 않았다. 홍 교수가 미국에서 약을 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암 수술이나 줄기세포 치료를 받기 위해 해외로 가는 환자들은 있지만, 국산 신약을 해외에 문의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미국에서 엑스코프리의 한 달 약값은 1145~1423달러(약 158만~197만원)로 연간 약값이 2000만원을 넘는다. 이 약은 지난 1분기 매출만 1140억원에 이른다. 홍 교수는 “약값이 아무리 비싸도 꼭 필요한 환자들이 있다”며 “올해 안에는 약을 들여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포함 아시아 임상시험 진행 중

뇌전증은 뇌 특정 부위의 신경세포가 갑자기 흥분해 발작을 일으키는 질환이다. 뇌전증 환자는 발작을 ‘머릿 속에 우박이 쏟아지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마치 전선이 합선돼 스파크가 튀면서 문제가 생긴 것과 비슷하다.

한 차례 단발성 발작은 큰 문제가 없지만, 5분 이상 의식을 잃은 상태가 지속되면 뇌가 손상되기 시작한다. 발작이 반복되면 뇌가 받는 충격이 커져서 인지 기능이 떨어진다. 선천적 소아 뇌전증 환자가 발작을 얼마나 줄이는지에 따라 성인이 됐을 때 정상적 삶을 살지 여부가 결정된다.

기존의 항경련제가 잘 듣지 않는 난치성 뇌전증 환자들은 여러 약을 섞어서 쓰거나 신약을 시도한다. 세노바메이트는 1~3개 약물을 복용해도 발작이 멈추지 않는 난치성 환자에서도 효과가 확인됐다. 한국 뇌전증 환자들이 미국까지 가서 처방을 받으려고 하는 이유다.

효과 좋은 국산 신약이 국내 허가를 받지 않은 것은 규제 당국인 식품의약품안전처가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개발사인 SK바이오팜이 국내 허가를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SK바이오팜이 국내 허가를 신청하지 않는 표면적 이유는 아시아 임상시험이다. SK바이오팜은 중국 합작사인 이그니스 테라퓨틱스와 함께 한국·중국·일본에서 임상 3상 시험을 하고 있다. 회사는 아시아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동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이 겹치면서 미국과 간극이 벌어졌다고 본다.

SK바이오팜은 미국 직판을 제외하면 세노바메이트와 관련한 판권을 모두 이전했다. 일본 판권은 2020년 일본 오노약품공업에 계약금 50억엔으로 기술 이전했고, 중국 판권은 지난 2021년 이그니스 테라퓨틱스에 넘겼다. 국내 판권은 동아ST, 유럽 판권은 안젤리나 파마가 각각 가져갔다.

SK바이오팜이 자체 개발한 뇌전증 신약 '세노바메이트'(미국명 엑스코프리‧유럽명 온투즈리))./SK바이오팜

◇“약가 후려치기, 중증 질환은 제외 필요”

의료계는 세노바메이트가 한국보다 중국에서 먼저 허가를 받고 처방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한국은 신약 도입이 어려운 곳이다. 건강보험 당국이 신약 약가를 낮게 책정하는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 많이 쓰는 최신 뇌전증 치료제는 지난 2008년 미 FDA 허가를 받은 빔팻(성분명 라코사미드)의 제네릭(복제약)이다. 오리지널 약은 2010년 일찌감치 국내 허가를 받았지만, 건강보험급여를 받지 못한 채 2018년 철수했다. 빔팻을 개발한 벨기에 유씨비파마는 지난 2019년 차세대 뇌전증 신약 브리비액트에 대해 한국 허가를 받았지만, 이 역시 약가 문제로 아직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제약 업계는 SK바이오팜이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먼저 허가를 받은 것도 약가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한국에서 먼저 허가를 받았다가는 해외 규제 당국이 한국의 낮은 약가 수준으로 자국 약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세노바메이트 판권을 가진 중국과 일본 제약사 역시 한국의 낮은 약값으로 타결을 하면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보령(옛 보령제약)이 2010년 15번째 국산 신약으로 허가받은 고혈압 약인 ‘카나브’가 좋은 예다. 보령은 해외 시장 공략을 앞두고 보험 당국에 약가를 높여 줄 것을 요청했다. 국내 약가가 높아야 해외 시장에서도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국내 환자 부담은 회사가 일부 맡아 실제 약가는 보험 당국이 생각하는 수준이 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래도 보험 당국은 거절했다.

대한뇌전증학회 회장인 가천대 길병원 신동진 교수는 “일본은 한국산 신약을 자국에 들여오기 위해 전폭적으로 지원하는데,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며 “적어도 뇌전증 같은 중증 질환 약은 신약이 들어올 수 있게 정부가 약값을 제대로 산정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SK바이오팜 관계자는 “한국과 일본은 이미 판권을 다른 회사에 넘겨 우리가 허가 절차를 진행하지 않는다”며 “코로나19로 인해 늦춰진 아시아 임상 3상 시험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아시아 시장에서 빠른 허가가 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국내 판권을 가진 동아ST 관계자는 “한국 허가를 빠르게 진행해 발매를 최대한 앞당길 것”이라며 “2026년에는 발매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