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 갈등에 따른 의사 휴진이 대학병원 교수와 개원 의사 등 의료계 전반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면서, 제약·의료기기 업계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진료가 줄면서 이미 병원 매출이 타격을 받았는데 아예 병원이 문을 닫으면 피해가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13일 제약·의료기기 업계에 따르면 다음 달 발표하는 2분기 실적이 전보다 감소한 업체들이 많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2월 전공의들의 집단 이탈 이후 대학병원들이 입원과 수술을 축소하는 비상 경영체제가 장기화하면서 2분기 실적 악화가 현실화했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일반의약품(OTC) 사업 비중이 큰 제약사보다는 처방약, 전문의약품(ETC), 의료기기 사업 비중이 큰 기업들의 2분기 매출과 영업이익 감소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경영 상태가 나빠진 대형 병원이 주 고객이기 때문이다. 대학병원들은 의료 인력 공백에 대응하며, 입원과 수술 환자를 줄이면서 수액 사업을 하는 JW중외제약과 HK이노엔이 타격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항암제, 희소질환 치료제, 혈액제제 사업 부문의 매출도 감소한 것으로 파악됐다.
다음 달 2분기 실적 발표를 앞둔 국내 제약사 관계자는 “아직 정확한 수치가 나오지 않았으나 2분기 수액제제 매출이 감소해 실적 악화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한 글로벌 제약사의 한국지사 관계자는 “대학병원의 진료 축소로 인해 신규 환자 발굴이 안 되다 보니 희소질환군 사업이 위축됐다”며 “항암제 사업 부문 매출에도 여파가 있다”고 말했다.
의료기기 업체도 마찬가지다. 일루미나, 메드트로닉 같은 글로벌 기업들도 대학병원의 비상 경영체제 돌입 이후 국내 시장에서 의료기기·장비와 소모품 매출 감소를 겪고 있다.
업계는 의료계의 집단 휴진과 진료 축소 같은 단체 행동이 장기화할 경우 하반기 경영 실적뿐 아니라 영업, 연구·개발 등 기업 활동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임상시험과 연구개발(R&D)에도 의정 갈등의 불똥이 튀었다.
일라이 릴리의 알츠하이머병 치료 신약 ‘도나네맙’도 국내 임상 3상 시험을 위해 5월 중 환자 모집을 마무리하고 6월부터 약을 투여할 계획이었는데, 의료진 부족으로 아직 환자 모집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한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의료계와 정부 갈등이 길어져 산업계에 미치는 타격이 커지면 큰 제약·의료기기 회사들은 R&D, 신사업과 신기술에 대한 투자를 축소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이로 인해 더 영세한 공급·납품업체와 바이오 기업, 스타트업들이 경영난을 겪는 식의 ‘도미노 현상’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의정 갈등에 따른 매출 감소는 제약사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대학병원 위주로 활동하는 한 중견 제약사 영업사원은 “의정 갈등에 따른 실적 악화 우려가 커지자, 회사에서 영업직의 일일 활동비(일비)를 줄인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한 의료기기 기업은 일부 직군에 대한 희망퇴직을 실시하고 있고, 영업·마케팅 부서 인력 감축과 인력 재배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 글로벌 제약사도 있다.
직원들의 피해는 대형병원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다. 서울 빅5병원 중 한 곳에서 일하는 직원은 “병원들이 적자 우려가 커지면서 간호사와 일반직을 대상으로 한 무급 휴가와 희망 퇴직을 시행해 병원 직원들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며 “3월 새 학기가 시작하면 끝날 것이라고 봤던 의정 갈등이 4월 총선을 지나도 끝이 잘 안 보여 답답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