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샌디에이고) 부속 레이디 아동병원은 희소질환 어린이 환자를 보고 있습니다. 여러 검사를 반복하는 것은 어린이 환자에게 큰 고통입니다. 일루미나는 유전체(게놈) 분석으로 혈액 검사부터 맞춤형 치료법을 제공하기까지 13시간 반에 끝냈습니다.”
지난 6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일루미나(Illumina) 본사에서 만난 크리스 커나드(Chris Kunard) 소프트웨어 고객지원 이사는 “어린이 환자들이 더 정확하게 진단받고 더 빠르게 치료될 수 있도록 유전제 분석 기술을 계속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커나드 이사는 일루미나에서 정보통신(IT)과 생물정보학 연구자들을 이끌고 고객들의 피드백(반응)을 제품 개발에 반영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유전체는 디옥시리보핵산(DNA) 유전 정보 전체를 의미한다. DNA의 유전 정보는 리보핵산(RNA)으로 복사된 다음 인체의 모든 생명 현상을 좌우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설계도로 사용된다. 유전체 분석은 이 DNA를 구성하는 A·G·C·T 네 가지 염기가 배열된 순서를 밝히는 일이다. 이 염기서열에 따라 단백질의 구성 성분인 아미노산들이 연결되는 순서가 결정된다.
일루미나는 북미에서 가장 큰 유전체 분석 회사이자, 전 세계 유전체 분석 장비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이다. 진단 시약이나 키트 같은 관련 유전체 분석 관련 원천 기술을 개발해 장비와 설비도 제조한다.
일루미나가 가장 강점을 갖는 분야는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NGS)’이다. NGS는 DNA를 작은 조각으로 나누고 동시에 해독한 다음, 생물정보학 기법을 이용해 조합함으로써 방대한 유전체 정보를 빠르게 해독한다. 2003년 인간게놈프로젝트가발표한 인간 유전체 지도는 13년에 걸쳐 3조원 가까운 비용을 들였지만, 일루미나는 NGS 기술로 200달러(약 27만5000원)대까지 줄었다.
기술력의 차이는 염기서열을 읽는 방법에 있다. 인간게놈프로젝트는 DNA 가닥을 증폭하면서 염기 하나씩 길이가 다른 복제본들을 만들었다. 각 복제본마다 끝에 있는 염기를 다른 형광색으로 염색했다. 이 형광을 차례대로 읽어 염기서열을 해독했다. DNA 가닥을 한 줄씩 읽어 시간과 비용이 엄청 들었지만, 일루미나는 NGS 기술로 유전체 분석에 드는 시간·비용 모두 크게 줄었다.
일루미나의 대표적인 NGS 장비는 ‘노바식(NovaSeq)’ 시리즈로, 가장 최신 제품인 ‘노바식 X 플러스’는 한 번에 128명의 유전체 분석을 44시간 안에 할 수 있다. 1년에 2만명 이상 유전자를 분석할 수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도 유전체 분석 회사 마크로젠이 5대를 구매한 데 이어, 랩지노믹스·EDGC(이원다이애그노믹스)·테라젠바이오·디엔에이링크 등 국내 대표적인 유전체 분석 업체들이 일루미나의 고객이다. 삼성서울병원, 분당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고려대 안암병원도 일루미나 제품을 쓰고 있다. 국내 유전체 분석 시장에서 일루미나의 시장 점유율은 80%에 달한다.
일루미나는 임직원이 9000여명인데, 그중 3400여명이 샌디에이고 본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본사는 사업 총괄 외에도 연구·개발(R&D), 유전체 분석 서비스를 맡고 있다. 일루미나는 샌디에이고에서 비교적 외곽에 자리했지만, 차로 10분 거리에 바이오·의학 분야에서 전 세계적인 명문으로 손꼽히는 UC샌디에이고, 세계 최대의 민간 생의학연구소인 스크립스(Scripps) 연구소가 있다.
–유전체 분석 기술만큼 데이터의 활용도 중요하지 않나.
“그렇다. 염기서열 해독 자체보다 해석이 중요하다. NGS에서 DNA를 재조립할 때 지침이 되는 유전자 지도, 생물의 종을 대표하는 유전체 서열을 ‘참조 유전체(reference genome)’라고 한다. 해독 과정에서 참조 유전체와 비교해 어떤 변이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다.
변이는 눈동자나 머리카락의 색깔일 수도 있지만, 질병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유전 질환이라면 겉으로 나타나는 표현형과 연결되는 유전자(유전형)를 찾아 어떤 유전자 변이와 상관관계가 있는지 도울 수 있다. 암 치료의 경우, 암세포의 유전자를 분석해 암에 맞는 유전적 특성을 파악해 가장 적합한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
–개인 단위가 아닌 집단 단위에서도 활용될 수 있나.
“인구집단에서도 DNA 데이터 분석이 유용하다. 특정 민족이나 인종별·성별 등 하위 인구그룹에 따른 유전적 차이를 알 수 있다. 이를테면 한국인이 특히 취약한 질병이나 건강과 관련한 특징을 파악한 뒤, 이를 참조 유전체로 삼아 개인에 대해 정밀의료를 할 수 있다. DNA 데이터에 진료 기록과 같은 의료 데이터를 결합하면 쓰임새가 더 커진다.
대규모 연령별·질병별 인구집단을 설정해 그 집단만의 특정 유전적 변이를 찾으면, 제약사가 신약을 개발하거나 혁신적인 치료법을 발견할 때 유용하다. 이 같은 집단 단위의 활용을 위해 최근 주요 국가들은 유전체 빅데이터(대용량 정보)를 구축하려고 한다. 영국의 바이오뱅크(UK Biobank) 사업, 미국의 올 오브 어스(All of Us) 사업이 대표적이다.”
–일루미나는 이 같은 빅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할 계획인가.
“현재까지 유전자 데이터베이스는 대부분 서구 쪽만 반영하고 있다. 유럽계 백인 정보 비율이 72%에 달한다. 이제는 나머지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계통도 충분히 반영해 진정한 의미의 정밀 의료가 가능해지길 바란다. 또 대규모 DNA 데이터베이스가 완성되면 유전자 정보의 생태계도 형성돼 양질의 연구가 가능해진다. 이를 통해 모든 인종과 민족이 유전체 분석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도록 하고 싶다.”
–한국도 100만명 유전체 빅데이터를 구축한다. 외국 사례에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우선 데이터의 질이 중요하다. DNA 데이터는 의료기록과 통합했을 때 더 효과적이다. 그래서 의료기록이 비교하기 쉽게 표준화돼야 데이터의 활용도가 높아진다. 이를테면 제약사가 임상시험을 위해 만든 데이터는 변수들이 통제돼 일관성이 있지만, 의사들의 실제 의료기록은 의사마다 차이가 있다. 규모 면에서도 대규모 데이터베이스들의 통합도 필요하다. 매우 희소한 질환이라면 데이터가 웬만큼 커도 잘 나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데이터에 대한 접근성 문제다. 데이터베이스를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연구자들의 접근이 어렵다면 활용될 수 없다. 이 문제는 규제나 법제도 중요하기 때문에 까다로운 규제를 가진 나라는 문제가 될 수 있다. 데이터의 활용 측면에서는 단순히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에서 지식이나 통찰 등 피드백을 얻어야 한다. 이를 위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때부터 어떻게 활용할지 목표를 설정하고 설계해야 한다.”
–NGS 시장의 트렌드 변화가 있다면.
“회사가 처음 설립된 당시에는 주로 과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일루미나를 찾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임상에 직접 쓰이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 고객이 과학자에서 의사로 바뀐 셈인데, 의사들은 유전학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복잡한 기술보다는 빠르고 직관적인 해결책을 알려주길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루미나도 원스톱 솔루션을 제공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기술 발전으로 전체 분석 비용이 많이 내려가면서 수요도 늘어났다. 이를테면 생애 초기 나타날 수 있는 질환과 증상을 미리 진단하는 신생아 유전자 검사가 있다. 현재 방식의 신생아 유전자 검사는 30가지 질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일루미나의 유전체 분석 기술을 활용하면 500~700가지 질환도 확인할 수 있다. 환경 문제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산이나 강에 얼마나 다양한 생물종이 살고 있는지, 생태학적 특성이 무엇인지 밝힐 수 있다. 하수에서도 바이러스를 검출해 전염병을 감시하는 데 적극 활용할 수 있다.”
–본사가 세계적 바이오 클러스터(집적지)인 샌디에이고에 있어 얻는 이득은.
“샌디에이고가 바이오테크로 유명하다 보니 인근 제약사나 의료기기 업체에서 양질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또 인근의 UC샌디에이고 같은 의료·바이오 분야 명문 대학, 솔크(Salk) 연구소나 스크립스 연구소 같은 유명 바이오 연구소에서 고급 인력도 공급받는다. 혁신이 일어나기 쉬운 환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