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알츠하이머치료재단의 알츠하이머병 이미지./조선일보DB

미국 제약사 일라이 릴리는 지난 3일(현지 시각) 미국 바이오기업 큐알리스(QurAlis)와 전두측두엽 치매와 루게릭병 치료 신약 후보 물질에 대한 독점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계약으로 일라이 릴리는 큐알리스가 현재 전임상단계인 치료 후보 물질 ‘QRL-204′를 개발하고 상업화할 수 있는 전 세계 독점 권리를 확보했다. 일라이 릴리는 큐알리스에 4500만달러(약 618억원)를 선불로 지불하고 약물이 개발 이정표에 도달하면 최대 5억7700만달러(약 7930억원)를 주기로 했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치매와 우울증, 불면증 같은 신경계질환 치료제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고령화로 신경계 질환 환자는 전 세계에서 크게 늘고 있는데 획기적인 치료제는 아직 없어 항암제만큼 시장성이 큰 분야이기 때문이다. 치료제 후보 물질과 개발사에 대한 대규모 기술이전 계약과 인수합병(M&A)도 잇따랐다.

시장은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신경계 연구개발(R&D) 투자가 계속 늘 것으로 전망한다.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이 발표한 2023년 연례 바이오약제 기술이전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신경과학 분야에 대한 시드·시리즈A 투자 총액은 6억3900만달러(8795억원)로 종양학(14억달러) 다음으로 투자가 가장 많은 영역이었다. JP모건은 이런 추세가 2024년 이후에도 계속될 것으로 예측했다.

◇루게릭병, 치매 막는 유전자 치료제 인수

일라이 릴리가 인수한 QRL-204는 루게릭병으로 불리는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ALS)’과 전두측두엽 치매 환자에게서 자주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UNC13A 유전자를 목표로 한 치료 후보 물질이다. UNC13A는 뇌 신경세포 연결부인 시냅스에서 신경신호 전달물질의 방출을 조절하는 단백질이다. 루게릭병 환자의 63%, 전두측두엽 치매 환자 3분의 1에서 이 유전자 변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QRL-204는 변이 UNC13A 유전자를 차단하는 이른바 ‘안티센스’ 유전자 치료제이다. 생명체는 유전물질인 디옥시리보핵산(DNA) 중 원하는 부분을 전령리보핵산(mRNA)으로 복사해서 단백질을 합성하는 설계도로 사용한다. 안티센스는 mRNA에 지퍼처럼 맞물려 단백질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RNA이다. 의미(sense) 있는 mRNA에 결합한다고 안티센스(antisense)라고 한다.

앤드루 애덤스 일라이 릴리 유전의학연구소장은 “QRL-204가 루게릭병과 치매 등 다양한 신경퇴행성 질환에 대한 의미 있는 발전을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다. 현재 일라이 릴리는 알츠하이머 치매 치료 신약인 ‘도나네맙’의 출시를 위해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 업계는 회사가 새로운 치매 치료 후보 물질을 파이프라인(신약 후보군)으로 추가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만큼 시장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다.

전자 현미경으로 관찰한 뇌 조직의 신경 세포. 크기에 따라 다른 색으로 나타냈다./구글, 미국 하버드대

◇경쟁사들은 마지막 임상 3상 성공

일라이 릴리가 아직 전임상 단계인 치료제에 8000억원대 규모로 기술이전 계약을 한 것은 다른 경쟁사들이 앞다퉈 신경질환 치료제 파이프라인을 추가하고 있고, 일부는 신약 개발 성공을 목전에 둔 데 대한 위기감이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바이오젠과 일본 에자이가 개발한 알츠하이머 치매 치료제 ‘레켐비(성분명 레카네맙)’는 지난해 12월 미국 식품의약국(FDA)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일라이 릴리도 알츠하이머병 치료 신약 도나네맙의 가속 승인을 노렸으나 지난해 1월 미국 FDA가 승인을 거절했다.

미국 존슨앤드존슨(J&J)은 지난달 말 우울증·수면장애 치료 신약 후보 물질인 ‘셀토렉산트(seltorexant)’가 임상 3상 시험에서 모든 1·2차 지표를 충족시킨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이번 임상 3상 시험은 불면증을 동반한 성인‧고령층 주요 우울장애(MDD) 환자들을 대상으로 기저 항우울제들과 함께 셀토렉산트를 보조요법제로 병용해 안전성과 유효성을 평가한 것이다. J&J는 이 약물이 향후 연매출이 최대 50억달러(6조원)까지 가능하다고 예측했다.

자체 후보 물질이 없으면 아예 개발사를 통째로 인수하기도 한다. 미국 제악사 브리스톨 마이어 스퀴브(BMS)는 지난해 12월 카루나 테라퓨틱스를 140억달러(약 19조원)에 인수했다. 카루나는 조현병 신약 후보 물질인 ‘카엑스티(성분명 자노멜린-트로스피움)’를 개발했다. 카루나는 카엑스티에 대한 임상 3상 시험을 완료하고, FDA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카엑스티는 기존 조현병 치료제와 달리 도파민 수용체를 직접 차단하지 않는다. 도파민 수용체를 직접 차단하는 약물 작용 원리로 인해 졸림과 체중 증가 같은 부작용을 보이는데, 카엑스티는 이런 기존 정신질환 약물의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아 의학계와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BMS에 따르면 환자 110명 대상 임상시험에서 44주차에 환자 80%가 증상이 호전됐으며, 메스꺼움이나 구토 등 가벼운 증상 외 치명적인 부작용은 관찰되지 않았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치매, 파킨슨병 같은 신경계 질환은 환자 수는 많은데 병인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아 글로벌 제약사들이 자본과 인력, 기술을 투입해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영역”이라며 “글로벌 제약사들이 보유한 블록버스터 치료제들의 특허 만료가 잇따르고 기대했던 신약이 승인되지 않은 위기감도 대규모 기술이전, 인수합병에 반영돼 있다”고 했다.

SK바이오팜 뇌전증 신약 세노바메이트(미국 제품명 엑스코프리)ⓒ 뉴스1

◇개발 어려우나 성공하면 바로 블록버스터

신경질환 치료 신약은 항암제에 이어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제약·바이오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미국에서 암으로 인한 사망률은 지난 20년간 27% 감소했다. 바이든 정부는 2022년 25년 동안 암으로 인한 사망률을 50% 이상 낮추겠다며 ‘캔서 문샷(Cancer Moonshot)’ 프로젝트를 재출범시켰다. 케네디 대통령이 국력을 총동원해 단기간에 달로 인간을 보내는 데 성공한 것처럼, 국가 연구개발 역량을 한 데 모아 암을 정복하겠다는 것이다.

질환의 완치가 가능해지면 관련 치료제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른 것은 신경질환 분야다. 알츠하이머 치료제는 미국 FDA에 승인된 약물이 5개뿐이다. 2050년까지 알츠하이머 환자 추정 수는 1억30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며 연간 사회적 비용은 약 1300조원으로 추산된다.

신경과학 영역에서 신약 개발 성공률이 높지는 않다. 신경학 분야 치료제의 임상 1상부터 허가 신청까지의 성공률은 2021년에 4.9%, 2022년 6.3% 수준이다. 발병 원인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한계로 인해 신약의 치료 효과와 안전성을 입증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어렵지만 승인을 받으면 바로 글로벌 블록버스터 신약이 될 수 있다. 시장조사기관 아이큐비아(IQVIA) 연구소에 따르면, 2023년 1월 기준으로 후보 물질 탐색 단계부터 임상 3상 시험 종료 단계에 있는 전 세계 중추신경계(CNS) 질환 신약 파이프라인은 940개이다.

국내에서도 신경질환 치료제 개발이 잇따르고 있다. SK바이오팜이 뇌전증 치료 신약 세노바메이트 개발에 성공했다. 이 약은 미국 FDA 허가를 받아 현지에서 엑스코프리라는 이름으로 판매 중이다. SK바이오팜의 성공에 고무된 국내 제약사들은 마땅한 치료제가 없는 신경질환에 도전하고 있다. 부광약품, 에스바이오메딕스, 카이노스메드, 에이비엘바이오도 를 따라 파킨슨병 치료 신약 후보 물질을 개발하고 있다.

부광약품이 개발 중인 JM-010은 파킨슨병 환자가 겪는 이상 운동증 증상 완화를 목적으로 한다. 에스바이오메딕스는 배아줄기세포를 중뇌 도파민 신경전구세포로 분화시키는 기술로 파킨슨병 치료 신약 후보 물질 ‘TED-A9′를 개발하고 있다. 카이노스메드도 파킨슨병 신약후보 물질 ‘KM-819′에 대해 미국에서 임상 2상 시험을 진행 중이다. 에이비엘바이오의 파킨슨병 신약 후보 물질 ‘ABL-301′는 미국 임상 1상 단계로, 임상 2상부터 상업화까지는 글로벌 파트너사인 프랑스 사노피가 진행할 예정이다. 두 회사는 지난 2022년 ABL-301′ 공동 개발 계약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