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체-약물 접합체(ADC)를 개발하는 리가켐바이오사이언스(옛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는 지난해 12월 미국 존슨앤드존슨의 자회사인 얀센 바이오텍과 2조 2400억원 규모로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이 회사의 ADC 플랫폼(기반기술)에 이탈리아 제약사 메디테라니아로부터 도입한 항체를 적용한 항암제 후보물질을 얀센이 사들인 것이다.
ADC는 암세포만 골라 파괴하도록 고안한 약물 전달 기술이다. 기존 화학 항암제는 혈관을 타고 흐르면서 암세포뿐 아니라 정상 세포까지 파괴해서 부작용이 심했다면, ADC는 암세포 표면의 항원과 결합하는 항체(미사일)에 독성 항암제(탄두)를 붙여 투입한다. 일본 제약사인 다이이찌산쿄가 아스트라제네카와 함께 개발한 ‘엔허투’가 대표적인 ADC 신약이다. 엔허투는 2019년 미국에서 유방암 변이 단백질인 허투(HER2)를 공략하는 항암제로 승인을 받았는데, 작년 매출이 13억1000만 달러(1조 7600억원)에 이른다.
리가켐이 얀센에 수출한 신약 후보물질은 개발과정에서 정부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박영민 국가신약개발사업단(KDDF) 단장은 “리가켐의 ADC가 정부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당 과제는 2021년 우리 프로그램에 발굴돼 동물실험 비임상 단계부터 기술 이전까지 전 단계에 걸쳐 지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KDDF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산업통상자원부·보건복지부가 함께 운영하는 범부처 국가 연구개발(R&D) 사업 프로그램이다. 박 단장은 “엔허투의 성공 이후 ADC와 같은 차세대 신약 플랫폼을 발굴하려는 시도가 전 세계에서 이뤄지고 있다”며 “한국이 글로벌 제약바이오 산업에서 뒤쳐져 있지만, 플랫폼 기술에서는 분명히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신약 개발이 성공하려면 대규모 임상시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시장 규모가 작은 한국이 글로벌 대형 제약사를 따라잡기 어려운 조건이다. 대신 박 단장은 플랫폼 신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R&D와 성실함의 싸움이니 우리에게 승산이 있다고 했다. 플랫폼은 다양한 신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반 기술로, 기존 의약품에 적용해 약효 지속 시간이나 약물 전달 방법을 다르게 하거나, 여러 인체 조직에 있는 하나의 생체 물질을 공략해 다양한 질병 치료제를 개발하는 방식이다. 박 단장은 “우리 정부가 신약에 연구비를 쏟아붓기 시작한 지 10년 정도 지났다”며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으로 따라잡을 때가 됐다”고 말했다.
박 단장은 전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면역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예일대 의대에서 연구한 의사과학자다. 박 단장은 대한면역학회 회장, 과기정통부부 기초의과학 선도연구센터(MRC) 센터장, 건국대 의생명과학연구원장, 한국연구재단 기초연구본부 의약학단장 등을 역임했으며, 직접 바이오벤처를 창업해 운영하기도 했다.
박 단장은 “국내 바이오벤처의 프로젝트를 보면 얄미울 정도로 연구를 잘 하는 곳들이 있다”면서도 “다만 세계 시장 공략을 위해서는 글로벌 대형 제약사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 단장 체제 출범 이후 KDDF는 국내 제약사와 해외 제약바이오 기업의 신약 공동 개발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박 단장은 오는 8~10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바이오코리아(BIO KOREA) 컨퍼런스에서 한국 제약바이오산업의 도약을 위한 ‘차세대 신약 개발 플랫폼’을 주제로 발표한다.
–신약을 개발하자면서, 왜 후보물질 대신 플랫폼 기술에 투자하자고 얘기하나.
“앤허투 이후 ADC는 항암제 개발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뤘다고 본다. 예를 들어 ADC 기술은 항암제를 다른 치료물질과 결합해 다양한 종양에 대한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미 널리 쓰이고 있으니 상업적 접근도 가능하다. KDDF는 지난해 ‘글로벌 블록버스터 ADC 항암제 구성요소 개발’ 사업을 통해 각 구성 요소인 항체, 링커(항체-약물 연결부), 페이로드(약효성분)를 개발하는 3개 주관 연구개발기관이 협력해 올해 안에 유망한 ADC 항암제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이 신약 개발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을 두고 ‘뒷심 부족’을 꼽는다.
“뒷심이라면 마지막 임상 3상 시험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임상 3상에 문제가 되는 것은 돈 문제일 수도 있고, 임상 전략이 정교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임상 전략이 정교해야 적은 비용으로 신약을 개발할 수 있다. 3상 수행능력은 자체적으로 키울 수도 있겠지만 경험이 있는 기관과 손을 잡으면 빠른 시간에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어떤 파트너링을 뜻하나.
“올해부터 글로벌 진출 파트너링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 국내 기업이 해외 파트너링을 통해 공동 개발을 하거나 기술이전을 할 수 있게 돕는다. 앞서 있는 글로벌 제약사와 공동 개발을 통해 임상시험 역량을 높이고,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 신약을 출시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 목표다. 임상 1~2상은 정부 지원이 가능하고 3상의 경우 정부에서 대규모 메가펀드나 해외 자본을 유치해 도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 사업에서도 ADC 같은 신규 플랫폼에만 191억원을 추가 지정했다.”
–R&D에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기존 사업 가운데 성과가 저조한 사업은 어떻게 되나.
“임상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임상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초기 개발 단계에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물질은 개발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결국 신약 성공을 좌우하는 것은 과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