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충북 청주시 오창읍 오창과학산업단지 내 GC녹십자(006280) 오창공장. 방진 모자와 작업복을 입고 들어간 혈장보관소 검사실 투시 창 너머로 흰 옷을 입은 직원들이 주황색 액체가 담긴 용기를 바코드로 관리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 용기 속 액체가 바로 '혈장'이다.
혈액은 적혈구, 백혈구 같은 유형성분과 액상성분인 혈장으로 구성된다. 혈장의 90%는 수분이고 약 7%가 단백질이다. 이 혈장단백질을 여러 방식으로 분리 ·정제하는 과정을 거치면 '알부민', '응고인자 제제', '면역글로불린 제제' 등 다양한 혈액제제를 얻는다. 선천성 면역결핍증, 면역성 혈소판감소증 같은 면역결핍질환과 희소질환 환자에게 꼭 필요한 치료제다.
GC녹십자는 지난 1971년 국내 최초의 혈액제제(혈장분획제제) 공장을 준공한 이후 혈액학 분야의 기술력을 쌓았다. 지난해 연말 미국 규제당국의 각종 평가 관문을 모두 통과하며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이 회사의 면역글로불린제제 '알리글로'가 미국 품목허가를 획득해 미 시장 진출 길이 열린 것이다. 국산 혈액제제가 세계 최대 미국 시장의 규제 장벽을 넘고 진출하게 된 건 처음이다.
혈액제제를 상업화하기 위해서는 고도화된 생산 기술과 대규모 설비 투자가 필수 요소다. 서류와 실사 등 까다로운 규제 절차도 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세계적으로 혈액제제 생산자는 매우 제한적이다. 기업으로선 핵심 경쟁력인 셈.
GC녹십자의 '알리글로' 미국 FDA 품목허가 획득은 미국 진출 도전 약 13년 만에 거둔 결실이다. 앞서 이 회사는 FDA에 품목허가 신청을 했으나 두 차례나 제조공정 관련 자료 보완을 요구받아 고배를 마셨다. 이후 세 번째 도전 끝에 허가에 성공한 것이다. GC녹십자는 '알리글로'를 올해 7월부터 미국 시장에 수출하는데, 바로 이곳 오창공장에서 이를 생산한다.
◇ 오창공장, 연간 130만리터 혈장 처리
2007년 부지 13만㎡ 규모로 설립된 오창공장은 GC녹십자의 혈액제제 등 주요 품목을 생산하는 핵심 사업장이다. 연간 130만리터에 달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혈장 처리 설비를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혈액제제는 세계 32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박형준 GC녹십자 오창공장 공장장은 "혈액제제 공장은 투입 혈장량을 기준으로 생산 능력을 얘기하는데, 연간 130만리터는 한국 적십자의 연간 수급 혈장 20만리터의 5~6배를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이라고 설명했다.
오창공장은 지난해 4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알리글로' 품목 허가를 위한 '생산시설 실사'를 받았다. 이를 통해 미국 우수의약품 제조·품질 관리기준을 충족하는 'CGMP 생산시설'로 거듭났다. 이런 여러 규제 관문을 거쳐 지난해 12월 FDA로부터 '알리글로'의 품목허가를 획득했다. 혈액제제 특성상 제조 공정이 무균 환경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이날 허용된 일부 공간만 볼 수 있었다.
치료제의 원천인 혈장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박형준 공장장은 "혈장은 채혈 후 8시간 이내에 영하 20도 이하로 급속 동결해 보관해야 한다"며 "분리·정제 작업 전 혈장 이상 유무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과정을 거듭 거쳐, 정상적인 혈장만 분류한다"고 설명했다.
분류된 혈장은 로봇시스템이 이동시켜 제조공정 작업에 들어간다. '알리글로' 제조공정의 첫 시작은 수집된 혈장을 대량으로 처리하는 '플라즈마 풀링(Plasma pooling)'이다. 이어 혈장을 침전시켜 다양한 단백질을 분리하는 '프랙셔네이션(Fractionation)' 단계를 거친다. 이렇게 분리한 단백질을 정제하고 바이러스 불활화하는데 이를 '퓨리피케이션(Purification)'이라고 한다. 이를 거쳐 최종 원액을 생산하고, 이를 무균 병에 충전·캡핑해, 충전된 제품에 라벨을 붙이고 개별 포장해 출하한다.
이번 FDA 승인을 기반으로 GC녹십자 오창공장은 혈액제제, 유전자재조합제제, 위탁생산(CMO) 사업을 통해 오는 2030년까지 '매출 1조원 규모 CGMP 공장'으로 도약하는 게 목표다.
특히 GC녹십자는 CMO를 차기 성장동력 중 하나로 육성할 계획인데 바로 이곳이 핵심 사업장이 될 전망이다. 박형준 공장장은 "2019년 이곳에 지은 국내 최대 규모의 완제공정시설 '통합완제관(W&FF)'은 기획 단계부터 자체 품목과 함께 위탁생산(CMO) 물량까지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고 했다.
충전·포장 시설, 무균충전설비(lsolator), 단일 사용(Single-use) 시스템을 갖춰 다양한 바이오 의약품 생산이 가능하다. 원료 입고부터 생산, 출하까지 전 공정을 자동화하는 최첨단 시스템이 적용됐다. 작년 초 세계보건기구(WHO)의 사전적격성평가(PQ Pre-Qualification) 인증도 취득해 국제기구 조달 의약품도 생산할 수 있다.
◇ 이우진 미국법인장 "알리글로, 고수익 가격 정책… 2028년 매출 3억달러"
국내 오창공장에서 생산된 알리글로의 미국 판매는 GC바이오파마USA가 맡는다. GC녹십자에서 30년 몸담은 이우진 GC녹십자 글로벌 사업본부장이 GC바이오파마USA 최고경영자(CEO)를 맡아 진두지휘한다.
이날 이우진 본부장은 "알리글로가 올해 연결 기준 5000만달러(약 665억원)의 매출을 거두고, 매년 5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해 진출 5년 만인 오는 2028년 약 3억달러(약 3994억원)의 매출을 달성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이 본부장은 "미국 면역글로불린 시장은 약 13조원 규모로 세계 최대 시장이자, 국내 약가 대비 약 6.5배 높은 최고가 시장"이라며 '고마진 가격 정책', '환자 접근성 향상', '계약 최적화' 등 3가지 전략을 핵심으로 미국 시장을 공략하겠다고 밝혔다.
이 본부장은 "미국 시장에서 '알리글로'를 면역글로불린 유통채널의 악 50%를 점유하고 있는 '전문약국(SP)'을 통해 공급할 계획"이라고 했다. 전문약국 채널은 많은 영업 인력이 필요 없으면서도 브랜드명이 아닌 '성분명 처방' 비율이 높아 신규 진입에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는 "이런 값비싼 특수 의약품을 취급하는 전문약국 채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빠르게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고자 한다"며 "보험환급금을 높게 설정해 전문약국의 보험 마진(중간이윤)을 보장하는 전략을 꾀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알리글로의 차별화 전략을 '가격 경쟁력'이 아닌 '품질 경쟁력'으로 내세워 높은 이윤을 남기겠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 본부장은 "알리글로의 제조사고시가격을 최근 출시된 제품들보다 더 높은 가격 수준으로 고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알리글로는 가격을 낮춰 출시하는 바이오시밀러, 제네릭 등 복제약이 아닌 오리지널 제품이므로 가격 경쟁력이 아닌 제품 품질 경쟁력으로 승부하겠다는 의미다. 여기엔 경쟁 의약품 대비 안전성과 적용 기술이 뛰어나다는 회사의 자신감이 깔려있다.
이 본부장은 "알리글로는 면역글로불린 정제 공정에 독자적인 'CEx 크로마토그래피' 기술을 도입해 제품의 안전성을 극대화한 제품"이라며 "이 기술은 혈전색전증 발생의 주원인이 되는 혈액응고인자(Fxla) 등 불순물을 제거하는 데 강력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술은 한국에서는 특허로 등록됐고, 미국에서도 특허 출원돼 있다.
그는 "과거 다른 회사가 제조한 먼저 출시한 혈액제제 제품이 혈전색전증을 유발하는 인자들이 있어서 대량 회수하는 사례가 있었다"면서 "알리글로가 보다 안전한 제품이라는 점을 부각해 포지셔닝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 본부장은 "이런 가격 정책을 계획한 데는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안(IPA)이 시행된 영향으로 매년 가격을 올리는 데 있어 제한적인 배경도 고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GC녹십자는 오는 7월 미국 주요 보험사 처방집(formuary) 등재와 함께 알리글로를 출시할 계획이다. 이 본부장은 "보험사(Payer)와 처방약급여관리업체(PBM), 전문약국(SP), 유통사(Distributor)까지 아우르는 수직 통합 채널 계약을 통해 미국 사보험 가입자의 약 75%에 알리글로를 등재시켜 점유율을 빠르게 확대해 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