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제약사들의 면역항암제 피하주사(SC)제형 전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혈관(정맥)에 투여하는 기존 정맥 투여(IV) 방식은 투여 시간이 길어 환자들의 부담이 컸다. 정맥 주사의 한계를 해결할 대안으로 투약시간이 적고 고통이 덜한 피하주사 방식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제약업계에선 피하주사 방식이 예상보다 시장에 더 빠르게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IV방식으로 면역항암제를 투여하면 약 30~60분가량 걸리는데 SC방식은 3~8분으로, 투여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22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미국 할로자임 테라퓨틱스는 최근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세계 최초의 PD-L1 면역항암제 피하주사(SC) 제품인 ‘티쎈트릭SC’가 지난해 8월 영국에서 승인된 후 1분기 만에 혈관 주사 시장을 18% 전환했다고 밝혔다. 이 속도라면 1년 이내 50%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할로자임 테라퓨틱스는 SC제형 변경 원천 기술을 보유한 회사로, 여러 글로벌 제약사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티쎈트릭 SC’는 글로벌 제약사 로슈의 항암제 티쎈트릭을 할로자임이 독자 보유한 ‘인핸즈’(Enhanze) 약물 전달 기술을 접목해 개발한 새로운 제형이다. 이 기술은 피부에 있는 당사슬을 잘게 부숴 약물이 지나갈 수 있도록 돕는 효소인 ‘인간 히알루로니다아제 PH20(rHuPH20)’을 기반으로 한다. 피하 조직 투과성을 높여 약물이 피하 조직에서 빠르게 분산돼 혈류에 흡수될 수 있도록 돕는다.
로슈의 HER2수용체 양성 유방암 치료제 ‘허셉틴SC’도 출시 3년 만에 60% 전환을 달성했다.
다른 항암제를 보유한 글로벌 제약사들도 작년 실적 발표와 함께 SC제형 전환 목표치를 잇달아 제시했다.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은 2025년 ‘옵디보SC’를 출시해 시장 전환율을 75%까지 잡고 있다고 밝혔다. 머크는 2025년 면역항암제 ‘키트루다SC’ 출시 계획과 함께 2028년까지 약 40조원 매출액 중 약 50%를 SC제형으로 전환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키트루다SC제형은 국내사 알테오젠(196170)이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엄민용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티쎈트릭SC제형의 시장 전환 속도에 비춰봤을 때 키트루다SC의 시장 전환이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며 “이 경우 알테오젠의 품목 독점 계약 변경 후 수취할 수 있는 로열티와 목표 매출 달성 시 수령하는 마일스톤 인식 속도도 빨라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전망했다.
SC제형 전환에 속도가 붙은 데는 세계 각국의 의료 비용 절감 정책 영향도 크다. 할로자임 측은 “유럽의 경우 의료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SC제형’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고, 이런 인식하에 SC제형 채택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메디케어 등 자동으로 보장이 되는 경우가 있지만 의사들은 출시 후 6개월 뒤 적용되는 ‘J코드’를 기다리는 경향이 있어 미국에서도 SC제형 전환이 이어질 것이라는 게 이 회사의 설명이다.
제약 기업들이 기존 항암제를 SC제형으로 변경하려면 정맥투여방식과의 유효성 비교 평가, 안전성 평가를 거쳐야 한다. 다른 질환군 치료제와 비교해 항암제는 제형 변경이 쉽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업계 관계자는 “약물 전달 기술이 발전하면서 항암제도 SC제형 변경이 가능해진 것이고, SC제형이 IV제형 대비 면역원성(면역반응을 일으키는 성질)이 낮아 약효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도 확인되면서 전환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외 제약사들이 기존 정맥주사 방식의 치료제를 SC제형으로 개발해 출시하고 있는 만큼, 의료진이나 환자가 직접 간편하게 투약할 수 있는 길이 확대될 전망이다.
셀트리온(068270)이 IV형태의 인플릭시맙을 SC제형으로 개발한 자가면역질환치료제 램시마SC(미국 제품명 짐펜트라)의 경우 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 주요 5개국에서 지난해 3분기 기준 약 20%의 시장 점유율을 달성했다고 회사 측은 밝혔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각각 37%, 26%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기존 램시마와 합하면 유럽 주요 5개국의 인플릭시맙 시장 점유율은 약 72%에 이른다.
셀트리온 관계자는 “치료 효과와 함께 환자가 병원에 방문하지 않고 자가 투여할 수 있도록 편의성을 크게 개선한 제품인 데다 글로벌 임상 데이터가 계속 쌓이면서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