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약을 허가받으려면 이 약을 사람에게 썼을 때 오리지널약과 효과가 똑같이 나타나는지 확인하는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절차이지만, 1990년대 초만 해도 한국에는 이와 관련한 가이드라인이나 규정이 없었다.
대구 영남대 약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국립보건안전연구원에 들어간 새내기 여성 연구사는 선배들과 함께 동물실험을 하면서 약효의 동등성을 평가하는 시험 기준을 만들었다. 이 연구사는 2015년 3D 프린터 맞춤형 의료기기 평가 가이드라인을 구축했고,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2년에는 국산 코로나19 백신인 SK바이오사이언스(302440) 스카이코비원 허가의 근거가 되는 ‘비교 임상’을 제시해 국제 합의를 끌어냈다.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 바이오생약심사부장을 거쳐 지난해 한국규제과학센터장으로 취임한 박인숙 센터장의 얘기다.
스카이코비원이 성공했는지 여부를 두고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이 백신을 개발하는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백신이 1차 접종으로 허가를 받으려면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사람을 대상으로 감염병 예방효과가 있는지를 시험해야 한다. 하지만 스카이코비원 임상을 진행하던 그때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온 것이 현재 쓰이고 있는 백신과 국산 백신의 효능을 비교해 검증하는 ‘비교 임상’이었다. 박 센터장은 규제당국 담당자로 국산 백신이 국제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국제보건기구(WHO), 의약품 규제기관 국제연합(ICMRA)을 설득하는 작업도 맡았다.
박 센터장이 취임했을 때 ‘적임자’라는 반응이 나왔다. 과학적 규제를 그만큼 잘 다룬 사람이 없다는 평가였다. 규제과학(Regulatory Science)은 합리적이고 명확한 규제를 만들 수 있게 의사 결정을 돕는 학문이다. 백신은 물론 의약품은 국민 건강과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규제의 벽이 높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전 세계가 효율적 규제를 적극 고민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선 백신 치료제가 필요했고, 그러려면 규제에도 과학이 필요했다. 미국 FDA는 지난 2011년 규제과학 발전 전략 계획 수립 10년 만인 2021년 ‘규제과학 선진화’ 보고서를 발간했고, 유럽의약품청(EMA)도 2021년 2025년 규제과학 전략을 발표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올해 8월 ‘규제과학혁신법(식품·의약품 등의 안전 및 제품화 지원에 관한 규제과학혁신법)’을 개정하며 규제과학 발전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박 센터장은 “규제과학을 기반으로 한 안전관리 체계의 강화, 그리고 선제적이고 예방적인 안전관리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국제적 흐름이다”라고 설명했다.
‘한국규제과학센터’는 식약처의 규제과학 전문가 양성의 콘트롤타워로 지난해 4월 공식 출범했다. 센터는 경희대⋅성균관대⋅아주대⋅중앙대⋅고려대⋅동국대 등 6개 대학에서 현장 실무경험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박 센터장은 이렇게 양성된 인재들이 해외 기관과 협업할 수 있게 교류를 확대하는 한편, 센터를 규제과학의 싱크탱크로 키울 구상을 밝혔다. 박 센터장을 서울 명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취임 1년을 맞았다. 가장 큰 성과는 무엇인가.
“취임 1년은 센터를 알리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노력했다. 식약처 퇴임 후 센터장 공모에 지원할 때 센터 운영 전략을 두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는 바이오헬스분야 글로벌 규제과학 인재 양성 허브화였다. 학생은 물론이고, 직장인과 식약처 심사 인력의 역량을 강화하는 규제과학 교육의 컨트롤타워가 되겠다고 했다. 두 번째는 규제과학 정책의 싱크탱크 역할을 제시했다. "
-규제과학이 무엇인가. 규제는 원래 과학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규제과학은 식의약 분야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예컨대 원자력 분야에서도 과학적인 규제 기준과 규제과학이 필요하다. 규제과학은 기술이 인간과 사회에 가장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해준다. 한국에서도 규제과학이라는 명칭이 없었을 뿐이지 식의약 분야에서는 규제과학이 활용되고 있었다. 미국 유럽에서 2010년 초반부터 규제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다만 코로나19 후에 ‘규제과학’이란 개념이 본격 등장했고, 이를 계기로 규제과학의 파급효과가 더 많이 생길 것으로 기대한다. 최근 정보통신기술(ICT) 발달로 기술 환경이 바뀌면서 규제과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식약처에 근무할 때 규제의 틀이 미비해서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나.
“융복합 헬스케어 제품 관련 규정이 불확실했던 2000년대 초,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복합한 신제품을 개발한 의료기기 회사와 상담을 했다. 개발자들은 의료기기로 허가를 받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다고 생각해 허가를 진행했는데, 결국 의약품 문제로 허가는 불발됐다. 이후 이 경험을 바탕으로 연구기획 총괄 부서에 있을 때 융복합 의료제품 개발 및 상담 지원 프로젝트를 기획해 만들어 냈다. 하지만 융복합 제품을 심사하는 건 여전히 어렵다.”
-현재 센터의 주 업무는 규제과학 인재 양성이다. 규제과학 대학원을 졸업한 학생들은 어떤 분야에서 일하게 되나.
“규제과학 대학원을 졸업한 석·박사급 전문인력들은 졸업 후 식품의약품안전처와 식의약 분야에서 연구 업무를 수행하는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정부 기관에 진출할 수 있고, 산업계의 연구개발·인허가·품질 담당자 등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글로벌 협력도 추진 중인가.
“규제과학 선진국인 미국, 유럽, 일본, 호주 등에서 글로벌 파트너십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올해 11월 우리 센터와 미국 USC(서던캘리포니아대) 약학대 규제과학부와 공동 세미나를 열었다. 또한 미국약물정보학회(DIA)와 함께 공동 워크숍을 개최했다. 국내에서 재생의료진흥재단, 다주체 규제선진화 협의체, 제약개발전문가회 등 유관기관과 업무협약을 맺고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센터가 미국 FDA의 규제과학 우수센터(Center of CERSI)와 협력 사업을 추진 중이라고 들었다. 어떤 내용인가.
“올해 미국 FDA-CERSI가 설치된 메릴랜드 대학(6월), UCSF 약학대학(8월)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내년부터 이들과 협력해 규제과학 대학원 재학생의 해외 교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석박사급 우수 학생을 선발해 해외 연수 기회를 마련하려고 한다. 장기적으로 교육 프로그램, 연구 협력도 추진할 계획이다.”
-규제과학 교육 프로그램에 자격제를 도입하는 논의도 진행되고 있나.
“그렇지 않아도 고민하고 있다. 식약처는 2014년부터 ‘의약품 규제 업무 전문가 양성 교육 과정’ 사업을 위탁 운영하고 있다. 이 교육 과정을 수강하면 두 차례 시험을 거쳐 수료증과 식약처장 명의 인증서를 발행한다. 내년부터는 국가 공인 자격증은 아니더라도 이 과정에 민간자격 등록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한국의료기기안전정보원은 ‘의료기기 RA 전문가 1, 2급’ 자격증을 시행하고 있다.”
-내년 계획이 궁금하다.
“내년에는 글로벌 협력사업을 더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산업계의 목소리를 담은 정책을 적극 제안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올해 5월 센터의 자문기구격인 ‘규제과학 CHAT’ 회의를 출범했다. 바이오헬스 관련 학계, 유관기관 전문가로 구성된 모임인데, 올해 회의에서 산업계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를 반영해 앞으로 국내외 규제, 규제과학 환경, 최신 과학기술 동향 등을 적극 반영해 식약처에 정책 개선을 제안하고 연구를 지원해 국내 규제과학 발전에 기여하는 싱크탱크 역할을 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