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관문억제제 티쎈트릭. /로슈

내년부터 스위스 제약사 로슈를 비롯해 글로벌 제약사들이 3세대 면역항암제를 피하주사(SC)제형으로 잇따라 선보일 예정이어서 항암제 시장의 지각 변동이 예상된다. 약물을 혈관(정맥)에 투여하는 정맥주사(IV) 방식에서 벗어나 의료진이나 환자가 직접 간편하게 투약할 수 있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16일 로슈에 따르면 유럽의약품감독국(EMA) 약물사용자문위원회(CHMP)는 이달 14일(현지 시각) 로슈가 개발한 세계 첫 피하주사 방식의 면역항암제 '티쎈트릭(성분명 아테졸리주맙) 피하주사(SC) 제형'에 대해 승인을 권고했다.

티쎈트릭은 프로그램된 사멸 리간드-1(PD-L1)에 작용하는 면역관문억제제다. 위원회는 폐·간·방광·유방암 등 티쎈트릭이 정맥주사 형태로 이전에 허가 받은 모든 적응증에 대해 피하주사를 써도 된다고 평가했다. '티쎈트릭 SC'는 앞서 지난 8월 영국 보건부 산하 의약품‧의료기기안전관리국(MHRA)이 세계 최초로 허가를 결정했다.

다른 글로벌 제약사들도 피하주사 방식으로 면역관문억제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어, 시장이 빠르게 전환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은 지난달 옵디보(성분명 니볼루맙) 피하주사 제형 임상3상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발표했다. 옵디보는 최초의 PD-1 표적 면역관문억제제로 2014년 일본에서 처음 품목허가를 받았다. 현재 미국과 유럽연합을 포함한 50개국 이상의 국가에서 승인을 받고 판매 중이다.

미국 머크는 2028년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성분명 펨브롤리주맙)의 핵심 특허 만료를 앞두고 2025년 출시를 목표로 '키트루다 SC제형'을 개발하고 있다. 키트루다는 면역관문억제제시장에서 가장 점유율이 높은 항암제인데 피하주사 개발은 로슈, BMS보다 한발 늦었다. 반대로 티쎈트릭은 정맥주사 방식으로는 키트루다, 옵디보보다 2년 늦게 출시됐는데 피하주사는 가장 빨리 출시하게 됐다.

피하주사 방식의 면역항암제는 암 환자의 투약 불편함이 줄고 환자와 의료진, 간병인 모두 기존보다 편의성이 개선된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정맥주사 방식으로 면역항암제를 투여하면 약 30~60분 가량 걸리는데 피하주사는 3~8분에 그쳐 투여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지난달 유럽종양학회(ESMO)에서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티쎈트릭의 정맥주사와 피하주사 모두 임상적 유용성과 안전성이 유사했으며 의료전문가 대상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피하주사 방식이 의료팀의 시간을 아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제약사들이 이처럼 일제히 피하주사 개발에 뛰어든 것은 블록버스터 의약품의 특허 만료에 따른 경쟁력 약화를 방어하려는 목적이 크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주요 특허 만료로 바이오시밀러(바이오복제약) 출시가 이어지면서 시장 지배력을 상실할 것에 대비한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로슈는 실제로 지난 2014년과 2019년 유럽과 미국에서 각각 특허가 만료된 유방암 치료제 '허셉틴'의 시장 지배력을 방어하기 위해 표적항암제 복합제 '페스코(Phesgo)'를 선보였다. 정맥주사 방식이던 '허셉틴'과 '퍼제타' 등 2종의 항암제를 피하주사로 만든 복합제다. HER2 양성 유방암 환자와 HER2 양성 조기 유방암 치료에 쓰인다.

허셉틴과 퍼제타를 정맥에 투여할 경우 60~150분이 걸리는데, 페스코는 5~8분 정도 걸려 치료 시간을 약 90% 줄일 수 있다. 페스코는 현재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에서 보험 급여를 적용하고 있다. 한국은 2021년 9월 항암제 최초 개량생물의약품으로 허가 받아 올해 8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중증암질환심의위원회에서 급여 적정성을 인정받았다.

로슈는 올해 3분기 143억프랑(약 21조원)의 매출을 거뒀는데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3.2% 줄어든 규모다. 코로나19 진단 수요가 줄면서 진단 부문 실적이 부진한 결과다. 하지만 블록버스터 의약품을 중심으로 제약 부문 3분기 매출액은 109억프랑(약 16조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 늘어 실적 감소를 일부분 방어했다. 특허가 만료된 항암제 허셉틴과 아바스틴, 리툭산·맙테라의 3분기 매출액은 11억3000만프랑(약 1조654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3.5%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