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사들이 제네릭(복제약)과 개량신약 생산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토종 신약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HK이노엔(195940)의 위식도 억류질환 신약인 ‘케이캡(성분명 테고프라잔)’은 지난해 1321억원의 처방 실적을 올렸고, 유한양행(000100)의 폐암 신약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는 국산 항암제 가운데 처음으로 1차 치료제로 허가를 받았다.
대웅제약(069620)의 국산 당뇨병 치료제 ‘엔블로(성분명 이나보글리플로진)’는 국내 종합병원에서 처방이 시작됐다. SK케미칼이 개발한 국산 1호 신약인 선플라주가 1999년을 허가 받은 이래로 국내 신약 개발 역사상 모두 처음 있는 일이다.
◇해외에서 종횡무진하는 국산 신약들
25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HK이노엔의 중국의 파트너사인 뤄신 산둥그룹 류 나오지 회장이 올 9월 한국을 찾는다. 뤄신은 HK이노엔이 지난 2015년 케이캡(중국명 타이신짠)의 중국 내 생산과 유통권을 판매한 중국의 제약사다. 류 회장이 한국에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류 회장의 한국 방문을 놓고 케이캡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아이큐비아에 따르면 중국 소화기 궤양 치료제 시장 규모는 3조 원이 넘는다. 소화기 궤양 시장의 10%만 차지해도 3000억원에 이른다. 뤄신이 세운 올해 케이캡 매출 목표는 10억 위안(약 1888억원)인데, 류 회장의 방문 계기로 목표치가 높아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케이캡은 P-CAB(칼륨 경쟁적 위산분비억제제) 계열의 치료제인데, 다케캡과 같은 기존의 PPI(양성자 펌프 억제제) 계열 치료제와 비교해 약효가 빨리 나타난다. 이런 강점을 바탕으로 글로벌 위식도 역류질환 치료제 시장에서 한국 제약사들의 신약이 일본 다케다제약의 ‘다케캡(성분명 보노프라잔)’과 맞붙고 있다.
HK이노엔의 ‘케이캡’은 2018년 허가 후 35개국 수출 계약을 맺었고, 대웅제약의 ‘펙수클루’는 2021년 허가 후 15개국에 진출했다. HK이노엔 관계자는 “신약 허가를 받을 때만 해도 연 1000억 원 매출을 기도했는데, 연 매출 5000억원을 코 앞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연매출 1000억원 국산 신약 봇물
대웅제약은 올해 초 브라질과 멕시코에 당뇨병 신약 ‘엔블로’를 수출하는 계약을 맺었다. 국내 출시 전에 이뤄진 첫 번째 수출 계약이다. 현지 파트너사인 목샤8은 대웅제약에 10년간 최대 1096억원을 지급한다. 대웅제약은 지난 2022년 펙수클루, 올해 엔블로를 출시하며 2년 연속 국산 신약을 내놓는 진기한 기록도 세웠다.
엔블로는 SGLT-2(소금포도당수송체)를 억제해 당뇨병(혈당) 신부전(혈압)을 치료하는 약이다. 혈당만 낮추는 제네릭은 많지만, SGLT-2 계열의 당뇨병 치료제 국산화에 성공한 건 대웅제약이 처음이다. 대웅제약은 가격 경쟁력과 적은 용량으로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강점을 내세워 향후 3년 안에 연 매출 1000억원을 달성할 목표를 세웠다.
유한양행이 개발한 폐암 항암제 신약 렉라자는 지난달 30일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폐암 1차 치료제로 변경 허가를 받았다. 국산 폐암 신약이 1차 치료제로 허가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렉라자는 특정 유전자 변이(EGFR)가 있는 비소세포폐암 환자를 위한 표적항암제다.
렉라자는 영국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와 함께 3세대 항암제로 분류되는데, 건강보험에만 등록되면 렉라자의 연 매출이 1000억원까지 늘어날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이 밖에 한미약품의 롤론티스는 미국 시장 진출 첫해인 지난해 1010만 달러(약 130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SK바이오사이언스가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개발해 낸 국산 코로나19 백신 스카이코비원도 있다.
◇신약 개발 이끌 차세대 기술은 플랫폼
최근 10년 한국의 제약 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세계 시장에서 승부를 보려면 ‘아직 멀었다’는 반응도 나온다. 일본 제약사인 다케다제약과 국내 제약사를 비교해도 격차는 상당하다. 다케다제약의 지난해 매출은 4조 274억 엔(약 37조 원)으로 삼성바이오로직스(약3조원)의 12배에 이른다.
글로벌 전문가들은 ‘플랫폼 기술’을 강조했다. 모더나 공동 창업자인 로버트 랭거(Robert Langer)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올해 4월 한국 제약 바이오 기업인을 만난 자리에서 “플러그 앤드 플레이(Plug and play·꽂으면 바로 실행된다는 뜻)가 가능한 플랫폼 기술을 개발하라”고 조언했다.
‘플랫폼’은 의약품 개발에 쓰이는 기반 기술을 뜻하는데 모더나가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할 때 쓴 mRNA 기술이 바로 플랫폼이다. 항체 의약품을 탑재하는 항체 약물 접합체(ADC), 선천적 유전병을 앓는 환자에게 건강한 세포 유전자를 주입해 질병을 치료하는 세포·유전자 치료제(CGT) 기술도 플랫폼에 해당한다.
◇ “기술수출만으로는 글로벌 진입 어려워”
한국 제약 산업이 글로벌 수준이 되려면 기술 개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이병건 지아이이노베이션 회장은 “‘좋은 후보물질’을 찾아 글로벌 제약사에 수출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 제약사 리제네론을 예로 들었다. 황반변성 치료제인 ‘아일리아’와 아토피성 피부염 치료제 ‘듀피젠트’를 개발한 이 회사의 작년 연 매출은 16조 원에 영업이익률이 38.4%에 이른다.
리제네론은 지난 2006년 독일의 베링거 인겔하임에 아일리아를, 듀피젠트는 2007년 사노피에 기술을 수출했다. 그런데 미국 시장만은 스스로 개척했다. 아일리아의 지난해 매출은 13조 원, 사노피의 작년 매출은 10조 원인데, 미국 매출만 각각 8조원과 7조 원에 이른다.
다케다제약의 신약 전략도 기술이전이 아니었다. 다케다제약은 공격적 글로벌 인수합병(M&A)을 통해 미국 신약 시장을 자체적으로 뚫어나갔다. 다케다제약은 지난 2015년 허가를 받은 궤양성 대장염·크론병 치료제 엔티비오(성분명 베돌리주맙)만으로 연 7027억엔(약 6조원)의 매출을 올린다. 이 회장은 “리제네론의 올해 시가총액은 100조 원까지 치솟았다”며 “이는 단순 기술 수출에 머무르지 않고 시장을 개척한 결과”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