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스턴은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를 중심으로 병원과 연구기관, 제약바이오기업 1000여 곳이 밀집한 세계 최고 바이오 클러스터다. 글로벌 20대 제약·바이오기업 중 화이자·얀센·모더나 등 18곳도 뛰어난 연구 인력을 찾아 이곳에 진출했다. 돈도 넘친다. 미국 바이오 분야 벤처캐피탈 투자의 26%가 보스턴에 집중됐다.
인제니아 테라퓨틱스(INGENIA Therapeutics)는 보스턴 서쪽 워터타운의 바이오 공유 오피스인 '바이오랩스(biolabs)'에 입주한 항체 전문기업이다. 하버드대나 MIT까지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회사는 임직원이 12명에 불과하지만 벌써 시리즈A 펀딩을 포함해 200억원대 투자를 유치했다.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의 성공 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 이 기업은 서울대 박사인 한상열 대표가 2018년 설립했다. 연구소나 지사가 아니라 처음부터 본사를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에 세웠다.
한 대표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교포도 아니고, 미국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유학파도 아니다. 서울대 생명과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분자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은 토종 국내 박사다. 지난 8일 인제니아 사무실에서 만난 한 대표는 "2002년 박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 의대에서 8년간 연구원과 전임강사를 지내며 보스턴 바이오 생태계를 체험했다"며 "그때 바이오 연구 인력과 투자가 집중된 곳에서 시작하면 세계 최대 제약바이오 시장인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보스턴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한 대표는 2010년 한국으로 돌아와 삼성종합기술원에서 5년간 바이오 신약 프로젝트 리더로 일했다. 신약개발을 하고 싶었지만, 삼성이 바이오시밀러(바이오 복제약)로 사업의 초점을 맞추자 회사를 떠났다. 그는 2016년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 미세 혈관 질환 연구를 시작했다. 이때 고장난 미세 혈관을 정상으로 돌릴 수 있다면 다양한 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대표적인 예가 황반변성이다. 황반은 망막에서 시신경이 밀집된 곳으로 이곳에 비정상적인 혈관이 생기면 실명(失明)에 이른다. 한 대표는 미국 보스턴으로 돌아가 연구용 항체 기업 셀시그널링테크놀로지(CST)에서 3년 경험을 쌓은 후 2018년 9월 인제니아 테라퓨틱스를 설립했다. 한 대표는 "기술에 대해선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며 "신생 기업이 글로벌 제약사에 기술을 이전하려면 글로벌 네트워크에 진입하기 쉬운 보스턴에서 시작하자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인제니아는 신약개발의 초기 단계인 후보물질 발굴과 동물실험을 비롯한 전임상에 집중하고 있다. 첫 후보물질 'IGT-427′은 안과 질환 치료제로 초점을 맞췄다. IGT-427는 세계 시장을 장악한 황반변성 치료제인 '아일리아(성분명 애플리버셉트)'의 효능보다 뛰어나면서 주사를 덜 맞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한 대표는 설명했다.
회사는 글로벌 시장을 공략할 든든한 우군들도 확보했다. 현지 중견 바이오 기업인 모자이크 바이오사이언스의 에릭 퍼핀 대표와 글로벌 제약사 애브비의 타리크 가유르 전 석좌연구원 같은 쟁쟁한 전문가들로 회사 과학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특히 퍼핀 대표는 미국 리제네론에서 아일리아 개발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 회사의 '차세대 아일리아' 개발에 큰 힘이 됐다. 한 대표는 "세계적인 신약개발 전문가들을 회사 자문단으로 영입할 수 있는 건 보스턴에서 창업한 기업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며 "자문단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인제니아가 보유한 원천 기술의 차별화된 장점이 보스턴의 전문가들 사이에 알려졌다"고 말했다.
인제니아 최근 굵직한 성과를 잇달아 거뒀다. 국내 아우름자산운용과 인터베스트, 휴온스 등으로부터 100억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를 유치한 데 이어, 글로벌 바이오기업에 대규모 기술이전도 성사시켰다. 내년 상반기 임상시험도 앞두고 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미국 보스턴에서 창업하게 된 이유는 뭔가.
"처음 창업을 결심할 때부터 글로벌 시장으로 곧바로 나가고 해외 네트워크를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지역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하려면 회사도 그 생태계 안에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해외로 진출하는 것보다 아예 처음부터 해외에서 사업을 일구는 전략이었다.
이는 회사의 사업모델과도 연관이 있다. 신약개발의 시작 단계인 후보물질 발굴과 전임상을 통해 글로벌 기업에 이전하는 방식의 수익모델인데, 이를 위해서는 글로벌벌 수요에 맞는 전임상 데이터와 체계적인 임상 플랜을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래서 바이오 산업이 집중된 보스턴에서 출발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인제니아가 보유한 핵심 기술을 설명해달라.
"기초과학연구원(IBS) 혈관연구단 연구진이 '타이(Tie)2 수용체'를 활성화하는 항체가 혈관을 정상화하는 기전을 밝혀냈다. 혈관 손상과 혈액 누출을 막아주는 Tie2가 'Ang1′단백질과 결합하면 세포막 안쪽으로 신호가 전달돼 혈관을 튼튼하게 하고, 염증을 일으키는 신호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반면 Tie2에 'Ang2′단백질이 달라 붙으면 염증성 물질이 늘어나 혈관 내피세포가 불안해진다. 사람이 암에 걸리거나 염증이 생기면 Ang2가 Ang1보다 더 많이 생성된다. 인제니아는 Ang1의 역할을 대신하는 항체를 활용해 다양한 질병을 치료하는 물질을 개발하고 있다."
–당뇨황반부종, 습성황반변성 같은 안과 질환에 집중하고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창업한 지 얼마 안된 바이오 기업은 무조건 첫 번째 후보물질을 성공시켜야 한다. 생물학적으로 미세혈관이 가장 많은 기관이 눈의 망막인데, 우리 기술이 안과 질환에서 효과가 클 것이라고 판단했다. 전신에 걸쳐 나타나는 다른 질환에 비해 안과 질환은 기존 치료제와 차별화한 효과를 보여주면 시장에 진입할 가능성이 크다. 모든 걸 다 할 수 없으니 성공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을 택했다고 보면 된다."
–루센티스, 아일리아 등 기존 황반변성 치료제와 어떻게 다른가.
"현재 당뇨황반부종이나 습성황반변성은 혈관 누출을 막는 안구 내 항체주사가 표준 치료법이다. 현재 시장의 화두는 '이 주사의 투약 주기를 어떻게 줄여 나갈 것인가'이다. 현재 '루센티스(성분명 라비니주맙)'와 아일리아의 투약 주기는 각각 4주 1회, 4주 1회~8주 1회다. 작년 미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로슈의 '바비스모(성분명 파리시맙)'는 16주 1회로 주사 간격이 가장 길다. 인제니아의 'IGT-427′는 아일리아가 갖고 있는 효능은 그대로 유지하되 투약 주기를 바비스모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아일리아를 개발한 핵심 인력인 퍼핀 대표님도 우리 물질이 '넥스트(next, 차세대) 아일리아'로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고 했다."
–앞으로 임상시험 계획은 어떻게 되나.
"우선 전임상에서 효능과 투약 주기를 줄일 수 있다는 게 확인됐다. 이를 토대로 안과 질환에 특화된 글로벌 바이오텍에 이전을 했다. 내년 초 FDA에 임상시험계획(IND)을 제출해 내년 상반기부터 임상시험이 시작될 예정이다. 기술이전한 기업이 임상시험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하는 데 특화된 곳이어서 기대가 크다."
–앞으로 어떤 질병으로 적응증을 확대할 계획인가.
"현재 아토피와 같은 염증성 질환, 6개 암종, 녹내장을 대상으로 추가 동물실험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제일 효능이 좋았으면 하는 질환은 뇌암이다. 아직 제대로 드는 치료제가 없어서 빨리 새로운 대안 치료제로 상업화하고 싶은 마음이다. 또 여러 연구결과를 보면 우리 물질이 뇌암에 가장 잘 반응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보스턴에서 창업하려는 한국 기업들에게 조언한다면.
"미국에서 창업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아이디어, 사람, 돈, 용기인 것 같다. 이 모든 걸 다 갖추기는 쉽지 않지만, 네트워크가 포진돼 있는 곳에 들어오면 많은 자산을 얻을 수 있고, 글로벌 진출 시기를 훨씬 더 앞당길 수 있다. 다이내믹한 경험을 선호하시는 도전적인 대표님들이 많이 들어오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