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세계 최대 바이오의약품 생산 시설인 삼성바이오로직스 제4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이재용 부회장(왼쪽에서 두번째) 모습(삼성전자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회장이 최근 미국 출장길에서 글로벌 제약사 최고경영자(CEO) 5명을 잇달아 만나 향후 삼성의 바이오 전략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에서는 “삼성이 드디어 신약 개발에 뛰어들 준비가 된 것으로 보인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바이오 산업은 반도체와 비교하면 시장이 두 배 이상 크지만 인간의 생명과 연관돼 있어 기술 진입 장벽이 높은 분야로 통한다. 글로벌 10대 제약사는 미국과 유럽, 일본 기업만 들어가 있다.

이런 가운데 이 회장은 이번 출장에 존림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 사장과 고한승 삼성바이오에피스 사장과 동행해 글로벌 제약업계 거물들을 연달아 만났다. 삼성바이오로직스를 글로벌 위탁생산(CMO) 1위 기업으로 육성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 회장이 제약 바이오 산업 주류 시장 석권을 위한 시동을 걸 준비가 됐다는 평가가 업계에서 나온다.

◇ 바이오 ‘신수종’ 선정 13년 만에 초격차 선언

8일 삼성전자와 업계에 따르면 이 회장은 지난달 20일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미 일정에 경제사절단으로 동참한 이후 17일째 미국에 머물며 호아킨 두아토 존슨앤드존슨 최고경영자(CEO)와 조반니 카포리오 브리스톨마이어스큅(BMS) CEO, 모더나 공동 창업자인 누바르 아페얀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 CEO, 크리스토퍼 비에바허 바이오젠 CEO, 케빈 알리 오가논 CEO와 잇따라 만났다.

이 회장은 이들과 만나 바이오 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상호 협력 방안 등을 논의하고, 이후 삼성바이오로직스 북미 법인 임직원들을 만나 바이오 산업을 ‘제2의 반도체 신화’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삼성 특유의 ‘초격차’ 전략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는 것이다.

이 회장이 글로벌 네트워크를 가동해 업계 리더들을 직접 만난 것을 두고 업계에서는 “역시 삼성”이란 말이 나온다. 이 회장이 이번에 만난 기업은 삼성의 주요 고객이거나 공동 사업을 추진하는 기업들이다. 글로벌 3위 대형 제약사인 J&J는 삼성의 주요 고객사이며 BMS는 지난 2013년 삼성바이오로직스에 처음으로 의약품 생산 발주를 넣은 첫 고객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세계 최대 바이오클러스터인 미국 동부에서 글로벌 빅파마(Big Pharma) 및 바이오 벤처 인큐베이션 회사 등 바이오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글로벌 CEO들과 연쇄 회동을 가졌다. 사진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021년 11월 미국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 본사를 찾아 누바 아페얀(Noubar Afeyan) 모더나 공동 설립자 겸 이사회 의장과 만난 모습. /삼성전자 제공

바이오젠은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를 합작 설립했던 인연이 있다. 오가논은 삼성바이오에피스의 바이오시밀러 제품을 미국 및 유럽에 판매하고 있다. 글로벌 제약·바이오 전문 투자사인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은 모더나에 투자했다.

아페얀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 CEO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코로나19 백신 위탁생산 계약 체결과 연관이 있다. 이 회장은 지난 2021년에도 아페얀 CEO를 미국 캠브리지 본사에서 만나 코로나19 백신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그해 5월 모더나와 백신 생산 계약을 체결했다.

삼성은 지난 2010년 바이오 산업을 ‘신수종 사업’으로 선정했다. 당시 삼성전자 최고운영책임자(COO) 부사장이던 이 회장이 앞장섰고, 2011년 삼성바이오로직스, 2012년 삼성바이오에피스를 각각 설립하며 시장 개척에 나섰다.

삼성은 사업 초기 BMS를 비롯한 다국적제약사 출신 인재를 대거 채용해 삼성종합기술원에서 교육을 거쳐,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로 배치했다. 이후 인천 송도 공장 완공과 동시에 BMS와 첫 10년 위탁생산 계약을 따냈다. 존림 삼성바이오로직스 사장도 글로벌 제약사인 로슈·제넨텍 출신이다.

◇ “삼성, 제약 산업 가치사슬 핵심 되길”

국내 바이오업계는 삼성이 곧 신약 개발 도전장을 낼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과감한 투자, 압도적 제조 기술력을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분야에서 생산력 기준으로는 압도적인 글로벌 1위 기업이고, 작년 시가 총액 기준 전세계 제약 바이오 기업 중에서 스위스 론자(13위)에 이어 14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CDMO는 글로벌 제약사의 의약품 공정을 전수받아서 생산하는 작업이다. 오리지널 개발사로부터 의약품 원액을 전달 받아서 바이알(병)에 넣는 작업도 CMO에 속한다. 반도체 사업과 비교하면 ‘파운드리’와 비슷하다. 반대로 신약개발은 반도체를 설계하는 작업과 유사하다. CDMO와 비교하면 신약개발은 진입장벽이 훨씬 높고 성공확률도 낮다. 신약을 제약 바이오 산업의 꽃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전체 분석 기업인 일루미나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과학자는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전략적으로 성장하는 바이오업계 신규 플레이어”라며 “삼성이 제약 산업 가치 사슬의 핵심 플레이어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바이오 분야에서도 반도체 못지않은 대규모 투자를 지속할 것으로 기대한다”라며 “이재용 회장의 삼성은 이미 신약 개발에 돌입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종합기술원 연구원이 주사탐침원자현미경(SPM)을 조작하고 있다. SPM은 물질을 원자 하나까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비로 온도가 낮아야 더 정확하다. 종기원의 SPM은 국내에서 가장 낮은 온도에서 작동한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지난해 조호성 최고전략책임자(CSO) 부사장 등 신약 개발 전문가들을 대거 영입했다. 조 부사장은 BMS 수석 부사장 출신으로 삼성바이오에피스에서는 선행개발본부를 지휘하고 있다.

회사의 신수종 사업, 즉 신약개발을 주도하고 있다는 뜻이다. 조 부사장은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단백질 항체 기반 신약 전문가다. 삼성에 합류하기 직전까지 단백질 항체를 활용한 표적 항암 신약을 개발해 왔다.

◇ 반도체에서 쌓은 ‘노하우’ 바이오 접목

바이오 산업은 비용 대비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은 어려운 사업군으로 통한다. 국내 제약사들의 업력이 수십년에 이르지만, 세계적으로 성공한 기업은 한 곳도 없다. 이 회장이 그런 바이오 산업을 미래 핵심 산업으로 낙점한 이유는 ‘삼성 경쟁력’이 작동할 시장으로 봤기 때문으로 보인다.

삼성은 반도체 분야에서 명실상부한 글로벌 1위 기업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빠른 공장 건설로 유명하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4공장 외형 공사를 하면서, 내부에 ‘모형(mock up) 클린룸’을 설치해 바이오의약품 공정 배관(파이프라인)을 설계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 속도를 크게 단축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4공장 준공 현황. 왼쪽 위부터 오른쪽 아래까지./삼성바이오로직스 홈페이지

제한된 공간에 최대한 정보를 담는 반도체 생산 작업에 정밀성이 요구되는 것처럼 미생물을 다루는 바이오 의약품은 미세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반도체 공정의 ‘정밀성’ 노하우가 바이오 의약품 생산에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이오 산업은 글로벌 시장 규모가 크다. 시장조사기관인 아이큐비아에 따르면 글로벌 제약 시장은 2021년 기준 1조 4200억 달러 규모로 반도체 시장(5252억 달러)의 3배에 이른다. 인구 감소·고령화 등으로 앞으로 시장은 더 커질 가능성이 크다.

진입 장벽이 높지만, 반대로 한번 시장에 안착하면 다른 경쟁자가 나타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에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제약 바이오 산업이 국가 안보와 직결되면서 한국 정부와 협력과 국가적인 지원도 기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