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이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끌어냈다. 당시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한 사람이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1967)이다. 그는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에서 노벨상 수상자 21명을 포함해 당대 최고 과학자 6000여명을 이끌고 단 3년 만에 원자폭탄 개발을 성공시켰다.
과학영화 ‘인셉션’ ‘인터스텔라’로 국내에서만 3315만 관객을 동원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 최고의 과학자에서 종전 후 소련의 스파이로 몰려 몰락한 오펜하이머의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7월 21일 미국과 유럽 개봉에 이어 8월 15일 국내에도 개봉한다. 과학 학술지의 양대 산맥인 네이처, 사이언스와 미국 뉴욕타임스지는 각각 오펜하이머 전기를 쓴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영화가 과학자 오펜하이머를 얼마나 정확히 그렸는지, 오펜하이머의 삶에서 배울 교훈은 무엇인지 분석했다.
◇”과학 묘사 정확, 보어 부분 짧아 아쉬워”
네이처지는 지난달 26일 ‘원자폭탄 만들기(원제 The making of atomic bomb)’의 저자인 리처드 로즈(Richard Rhodes)를 통해 영화를 분석했다. 1987년 출간된 원자폭탄 만들기는 현대 물리학의 태동기에서 1940년대 맨해튼 프로젝트와 1950년대 수소폭탄 실험까지 다룬 기념비적인 책이다. 1987년 전미 도서상과 도서비평가협회상, 1988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로즈 작가는 “대체로 잘 만든 영화”라고 평가했다. 단 하나 잘못 묘사한 부분이 있다면 1938년 핵분열 현상이 발견된 후 물리학자들이 모여 핵무기 개발을 피하려고 “이건 외부에 알리지도, 연구하지도 말자”고 말하는 장면을 꼽았다. 실제로는 1902년 마리 퀴리가 방사성 물질 라듐을 처음 발견한 이래 40년 동안 모두가 원자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방법을 논의했다는 것이다. 소수가 비밀스럽게 알아내고 숨길 내용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를 풀어냈다. 하나는 오펜하이머가 미 육군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뉴멕시코주에 있는 로스앨러모스연구소의 기초를 닦는 모습을 그렸고,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원자폭탄보다 더 강력한 대량 살상 무기인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다가 비밀 취급인가 자격을 잃고 몰락하는 오펜하이머를 볼 수 있다.
로즈 작가는 오펜하이머가 38세 젊은 나이에 로스앨러모스연구소를 이끄는 자리에 발탁된 것은 전적으로 그로브스 장군 덕분이라고 했다. 오펜하이머는 노벨상을 받은 세계 최고의 과학자는 아니었지만, 그로브스 장군의 질문에 대해 언제나 알아듣기 쉽게 잘 설명해 인정을 받았다. 요즘 말로 하면 브리핑의 귀재였던 셈이다.
로즈 작가에 따르면 사람들은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로스앨러모스연구소를 세우고 이끌었을 뿐이다. 테네시주 오크리지와 워싱턴주 핸퍼드에 있는 연구시설에서도 플루토늄과 농축 우라늄을 생산했지만,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로즈 작가는 그로브스 장군이 없었다면 미국 정부가 맨해튼 프로젝트에 그토록 엄청난 투자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로즈 작가는 영화에서 그리지 않는 부분도 지적했다,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면서 사망자를 훨씬 적게 예측했다는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인들은 미군의 B29 폭격기가 오는 소리를 들으면 바로 방공호로 갔다. 이 때문에 미국은 원자폭탄을 투하해도 대부분 방공호에 대피한 뒤여서 죽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미국의 예측과 달리 일본인들은 당시 B29기 단 두 대만 뜨는 바람에 폭탄 투하가 아니라 기상 점검 비행이라고 오인하고 방공호로 가지 않았다.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의 이야기도 빠졌다. 보어는 독일의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와 양자물리학을 이끌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보어는 미국으로 가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했고,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지휘했다.
보어는 원자폭탄이 끔찍하지만 작은 나라가 가지면 강대국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핵무기가 일종의 전쟁 억지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1999년 둘 다 핵무기를 보유한 인도와 파키스탄의 카르킬 전쟁으로 근거를 잃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전쟁에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공공연하게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위협하고 있다.
◇”블랙홀 연구는 노벨상도 받을 수 있었다”
사이언스도 지난달 17일 오펜하이머 전기작가인 데이비드 캐시디(David Cassidy)와의 인터뷰를 통해 영화를 분석했다, 미국 호프스트라대 화학과 명예교수인 캐시디는 2004년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미국의 세기(J. Robert Oppenheimer and the American Century)’를 출간했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 이외의 과학 연구 성과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는 원래 양자물리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당시 양자물리학의 전성기를 이끈 하이젠베르크나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보다 3~4년 어렸기 때문에 학계 주역이 될 수는 없었다. 캐시디는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이 말한 대로 앞선 연구자들이 양자물리학이라는 과학혁명을 달성한 후 오펜하이머 같은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을 응용하는 마무리 작업을 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과학혁명에 이어 정상과학의 시대에 활동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캐시디 교수는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 수준은 아니었지만, 블랙홀에 관해서는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연구를 했다”고 밝혔다. 블랙홀은 사물을 끌어당기는 힘인 중력이 엄청나게 강해 모든 물질을 빨아들이는 천체이다.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해 검은 구멍이란 뜻의 이름이 붙었다. 오펜하이머는 1939년 별이 수명을 다하고 붕괴하면서 수축하면 엄청난 밀도를 가진 블랙홀이 생긴다고 발표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오펜하이머의 블랙홀 연구는 더 진척되지 않았다. 그의 블랙홀 이론은 1960년대 미국의 물리학자 존 휠러(John Wheeler)가 되살렸다. 캐시디 교수는 “1990년대가 돼서야 블랙홀에 대한 실험적인 증거가 나왔다”며 “오펜하이머가 그때까지 살아있었다면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캐시디 교수 역시 노벨상 수상 경력은 물론 행정 경험도 없던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지휘하게 된 것은 그로브스 장군의 전폭적 지원 덕분이었다고 밝혔다. 그로브스 장군은 오펜하이머가 공산주의자와 관련됐다는 비밀 보고서를 묵살하면서까지 그 자리에 오펜하이머를 두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로브스 장군은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어 군의 지휘체계 일부가 되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다른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봤다고 캐시디 교수는 설명했다. 대표적인 예가 노벨상 수상자인 미국 물리학자 어니스트 로런스(Ernest Lawrence)이다. 그는 이론연구자였던 오펜하이머와 달리 입자가속기를 개발한 실험물리학자였으며 정치적 입장도 보수였다. 하지만 그로브스 장군은 로런스가 자기중심적이어서 군의 지휘를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오펜하이머의 몰락은 전후 미국 정부가 추진한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 주도로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이 일자 오펜하이머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사람들은 그가 과거 공산주의자와 교류한 이력을 문제 삼았다. 그는 결국 정부로부터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고 청문회에 나가야 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했지만 결국 정부에서 일하는 데 필수적인 비밀 취급인가 자격을 잃었다.
오펜하이머가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그렇다고 일반인들의 생각과 달리 비극적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직장을 잃지도, 이민을 강요당하지도 않았으며, 블랙리스트(감시대상 명단)에도 오르지 않았다고 캐시디 교수는 말했다. 오펜하이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낙인처럼 찍혀 있던 옛소련 스파이 혐의도 이제 사라졌다. 지난해 12월 제니퍼 그랜홀름 미국 에너지부 장관이 “오펜하이머에 대한 편견과 불공정의 증거가 밝혀졌고, 오펜하이머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확인해 스파이 혐의를 철회한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앞으로 오펜하이머의 명예를 회복하는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아인슈타인이 바보라고 부른 사나이”
영화의 원작은 2005년 카이 버드(Kai Bird)가 출간한 ‘미국의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의 승리와 비극(American Prometheus: The Triumph and Tragedy of J. Robert Oppenheimer)’이다. 버드는 이 책으로 그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버드 작가는 지난달 17일 뉴욕타임스지 기고문에서 1954년 봄 어느 날 오펜하이머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상대성이론을 만든 세계적인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마주친 장면을 묘사했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 이후 1947년부터 연구소장을 맡고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1933년 독일에서 탈출해 이곳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에게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비밀 청문회에서 자신의 스파이 혐의에 대해 변호해야 한다며 몇 주 결근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마녀사냥을 당할 의무가 없고 조국에 잘 봉사했다”며 “이것이 미국이 제공한 보상이라면 등을 돌려야 한다”고 했다. 오펜하이머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그때 복도에서 만난 비서에게 사무실로 돌아가는 오펜하이머를 가리키며 “저기 바보가 간다”고 했다고 한다.
버드는 오펜하이머가 핵무기 경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 것은 옳았다고 지적했다. 안보 청문회가 열리기 몇 달 전부터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 개발 결정을 비판했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보다 훨씬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수소폭탄을 사용할 만한 군사적으로 타당한 목표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수소폭탄은 순전히 대량 살상 무기라고 했다.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 개발을 추진한 공군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지난 1일 오펜하이머의 후배 과학자들이 들고 일어섰다. 이날 전 세계 주요 의학 학술지 편집자 18인이 100여 개 학술지를 통해 ‘현재 핵 재앙의 위협은 매우 심각하고 점점 커지고 있으며 인류를 지키려면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동 사설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랜싯(LAncet)’과 ‘영국의학저널(BMJ)’, ‘미국의사협회지(JAMA)’,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신(NEJM)’ 등 주요 학술지가 참여했다.
편집자들은 성명에서 “전 세계 보건, 의학 저널의 편집자로서 우리는 보건 전문가들이 공중 보건과 지구의 필수 생명 유지 시스템에 대한 이 중대한 위험에 대해 대중과 지도자들에게 경고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촉구할 것을 요청한다”고 촉구했다. 핵무기와 의학 분야 연구자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의학 학술지 편집자들은 핵무기가 질병과 마찬가지로 공중 보건과 생명에 위협이 된다면 똑같이 싸우고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영화 오펜하이머가 오늘날 과학자들에게 주는 교훈이 바로 이런 것이다. 버드 작가는 뉴욕타임스지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가 누명을 쓰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오펜하이머 사건은 이후 모든 과학자에게 지식인으로 정치 무대에 서지 말라는 경고를 보냈다”며 “이것이 오펜하이머의 진정한 비극”이라고 말했다. 오펜하이머 이후 과학자들은 사회에 목소리를 내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버드는 오펜하이머에게 일어난 일은 현대 세계의 근간인 과학 이론에 대해 사회가 진지하게 토론하는 능력에도 타격을 입혔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 19 대유행 기간에 의료진에게 일어난 부당한 공격을 상기시켰다. 버드는 “이번 영화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지식으로서 과학자가 필요한지 대화를 시작하길 바란다”고 했다. 과학자가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낼 때 사회가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버드에 따르면 오펜하이머는 전후 핵무기를 반대했지만, 로스앨러모스에서 한 일을 후회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인간의 과학적 탐구를 막을 수 없고 원자폭탄 발명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으로 빨리 전쟁을 끝내는 것이 더 많은 인명을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동시에 오펜하이머는 인간이 이러한 기술을 조절하고 지속 가능하며 인간적인 문명에 통합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고 버드는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전후 핵무기 개발은 더는 하지 말고, 국제기구를 통해 지금 있는 기술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방법을 찾자고 주장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닐스 보어 역시 전후 원자력에 대한 국제협력을 추진했다. 두 사람의 노력으로 1950년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창설됐다. 오펜하이머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일은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달렸다.
참고 자료
Nature, DOI: https://doi.org/10.1038/d41586-023-02409-8
Science,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j8107
NYT, https://www.nytimes.com/2023/07/17/opinion/kai-bird-oppenheimer-christopher-nolan.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