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표권을 선점한 뒤 실제 주인에게 되팔아 이익을 챙기는 ‘상표권 사냥꾼’이 아파트 시장에도 진출하고 있다. 상표권은 선(先)출원주의로, 먼저 출원하는 사람이 상표권을 부여받는다.

지난해 10월 말 촬영한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공사 현장의 모습. /뉴시스

7일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재건축조합은 단지명 선호도 조사를 진행한다고 최근 조합원에게 공지했다. ‘올림픽파크 디원(D1)’, ‘올림픽파크 포레온(Foreon)’, ‘올림픽파크 리세안(Lisean)’, ‘올림픽파크 라힐스(LaHills)’ 등 4개가 후보로 올랐다.

둔촌주공 재건축조합은 앞선 2020년 3월 ‘올림픽파크 에비뉴포레’로 단지명을 정했다. 당시 조합은 상금 8000만원을 내걸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아파트 명칭 공모전도 진행했다. “명품 주거단지에 어울리는 아파트 명칭을 공모한다”며 대상 1명에게 5000만원, 우수상 1명에게 2000만원, 장려상 1명에게 1000만원의 상금까지 내걸었다. 이런 대대적인 과정을 거쳐 정해진 단지명을 포기하고 단지명을 다시 선정하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상표권에 있었다. 조합은 기존 단지명 ‘올림픽파크 에비뉴포레’가 길다는 지적에 ‘올림픽파크 포레’로 단지명 변경을 추진했지만, 이미 상표권이 출원돼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단지명을 새로 정하게 된 것이다. 조합 관계자는 “올림픽파크 포레로 단지명이 정해질 것 같자, 누군가 먼저 상표권을 출원한 것 같다”면서 “먼저 상표권을 출원한 사람은 조합원이 아니고 조합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실제 특허정보넷 키프리스에 따르면, A씨는 2020년 8월 ‘올림픽파크포레’로 상표권을 출원했다. 특허청 상표디자인심사국은 2021년 8월 이 상표가 기존 상표인 ‘더파크포레(경기 양주 태영건설더파크포레)’와 유사하며, 저명한 국제기관인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쓰는 약칭인 ‘올림픽’과 동일해 상표 등록해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A씨는 출원서를 보정(수정)하며 상표권 등록 절차를 이어가고 있다.

상표권을 선점하는 이같은 ‘상표권 사냥’은 사회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일이다. SBS 예능프로그램 ‘백종원의 골목식당’에서 소개된 포항덮죽집 사례가 대표적이다. 포항덮죽집 사장 최민아씨보다 한달여 빠르게 B씨가 상표권을 출원해 현재까지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특허청은 “B씨가 최씨보다 먼저 출원(선출원)했으나, 방송을 통해 이미 최씨 출처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부정한 상표 선점 사례”라며 B씨의 상표권 등록을 거절했다. 그러나 B씨가 불복심판을 청구하며 최씨 역시 ‘시소덮죽’과 ‘소문덮죽’ 등 상표를 정식 등록하지 못하고 있다. 상표권 출원 비용은 약 20만원으로 저렴하며, 상표권자가 되면 독점권과 타인 사용 금지권을 행사할 수 있어 상표권 사냥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진다.

아파트 시장에서는 그간 상표권 사냥이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명은 보통 서울 서초구 ‘반포자이’처럼 지역명과 아파트 브랜드를 더해 만들어져 상표권이 개입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파트 단지명에 ‘펫 네임(Pet Name·아파트 단지명 뒤에 붙는 별칭)’을 도입하는 것이 유행하자 상표권 중요도가 커졌다. 요즘엔 건설사도 우후죽순 상표권을 등록하고, 상표권 사냥꾼도 은근슬쩍 가세하는 모습이다.

키프리스에 따르면, 대우건설은 ‘에듀클라츠’, ‘엘리카운티’, ‘그랜드포레’ 등 상표권을 출원했다. 디엘이앤씨는 ‘레벤시아’, ‘라씨엘로’, 삼성물산은 ‘래미안 원페를라’, ‘래미안 플래티늄’,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엘스타시온’, ‘퍼스트 포레’ 등에 대한 상표권을 출원했다. 이런 이름을 가진 아파트 단지는 분양 예정 단지에도 없다. 건설사들은 상표권 분쟁을 피하기 위해 ‘펫 네임’에 쓰일 법한 단어를 미리 출원한 것이다.

한편, 둔촌주공 조합은 ‘올림픽파크 디원(D1)’, ‘올림픽파크 포레온(Foreon)’, ‘리세안(Lisean)’, ‘라힐스(LaHills)’ 등 단지명 후보 4개에 대해 모두 상표권을 출원해 놓았다. 조합 관계자는 “4가지 중 어떤 단지명이 최종 선정될지 확정되지 않았으나, 상표권 분쟁을 피하기 위해 이번에는 미리 상표권을 출원해 놓았다”고 말했다.

A씨가 출원한 ‘올림픽파크포레’는 ‘올림픽’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상표권 심사에서 거절됐는데, ‘올림픽파크 디원(D1)’ 등 둔촌주공의 다른 단지명 후보들은 심사를 통과할 수 있을까. 특허청 상표디자인심사국 관계자는 “올림픽과 같은 저명한 단어는 원칙적으로 상표권 등록을 할 수 없다”면서도 “예외적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올림픽파크뷰’ 오피스텔에 위치한 ‘올림픽파크뷰 공인중개사’가 특허청으로부터 상표권을 인정받은 사례가 있다. 또 올림픽공원 주변엔 ‘성내올림픽파크 한양수자인아파트’, ‘올림픽파크 동부센트레빌아파트’ 등 단지명에 ‘올림픽파크’가 붙은 아파트가 준공된 사례도 있다.

특허청 상표디자인심사국 관계자는 “표장(標章)의 주요 부분이 올림픽일 경우 상표권 등록을 거절하는 것이 원칙”이라면서 “A씨의 ‘올림픽파크포레’의 경우 ‘올림픽’ 글씨는 검은색, ‘파크’ 글씨는 녹색으로 주요 부분이 올림픽이어서 해당 상표권 등록을 거절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둔촌주공 조합이 낸 단지명에 대한 상표권 심사는 추후 심사가 이뤄져 봐야 알 수 있다”면서도 “‘올림픽’ 단어가 부수적으로 이용됐거나 ‘올림픽공원(올림픽파크)’처럼 공공장소의 지명으로 인식될 경우 심사에서 통과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