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엔 조경이란 개념이 없었어요. 그냥 나무 심는 것 정도로 생각했죠. 그런데 이젠 달라요. 석가산(감상가치가 있는 여러 개의 돌을 쌓아 산의 형태를 축소시켜 재현한 것), 분수, 단지를 관통하는 물길, 주민운동시설, 순환산책로 등과 같이 아파트 단지 안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모든 것이 조경이죠.”

박도환(사진) GS건설 건축·주택디자인팀 책임은 조경 전문가다. 2003년부터 GS건설이 짓는 ‘자이(XI)’ 아파트의 조경을 맡아왔다. 이제껏 가장 혁신적인 조경으로 꼽히는 서울 서초구의 ‘반포자이’ 조경도 그의 손을 거쳤다. 반포 자이는 처음으로 단지 내에 물놀이 시설을 설치한 아파트로 유명세를 탔다. 요즘엔 웬만큼 신경 써서 만든 신축 아파트엔 대부분 물놀이 시설이 들어있다.

GS건설 '자이(Xi)'의 조경을 총괄하는 박도환 GS건설 건축·주택디자인팀 책임 / 최지희 기자

그에게 물놀이 시설을 어떻게 넣게 됐느냐고 물었다.

“괌에 있는 리조트의 카약장을 벤치마킹한 것이었어요. 조경은 트렌드 변화가 좀 빠른 편인데, 카약장 같은 새로운 아이템을 발빠르게 적용해 아파트 조경 트렌드를 이끌 때는 성취감이 커요. 그런 면에서 좀 오래 되긴 했지만 여전히 제게 가장 기억 남는 프로젝트기도 해요.”

박 책임은 지금도 조경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최근 그의 가장 큰 고민은 2023년 준공을 앞둔 개포 프레지던스 자이 조경이다. 여기에서 그는 또 한 번 조경 트렌드를 이끌 아이템을 선보이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훌륭한 조경은 무엇일까.

― 아파트 단지의 조경을 정의하자면

“건축을 전공하면 건물을 디자인하듯이, 조경은 대지를 디자인한다고 보면 된다. 아파트 설계를 할 때 먼저 건축에서 건물 위치가 정해지고, 그에 맞춰 동선 계획이 수립된다. 놀이터, 운동시설, 휴게소 등이 연속적으로 계획되는 과정에서 조경도 설계된다.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조경은 법적인 최소한의 요건만 충족하면 됐다. 그래서 아파트 조경의 정의를 내리기조차 민망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건설사마다 아파트 브랜드를 새로 만들고 경쟁하기 시작하면서 조경의 위상도 높아졌다. 현재 아파트 조경은 단지 건립 과정에서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핵심적인 부분이 됐다.”

―조경이 핵심적 요소가 됐다는 게 무슨 말인가

“재건축, 재개발 등 정비사업 과정에서 다른 건설사와 수주 경쟁을 하면서, 조합원들에게 희망사항을 물어본다.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현장에서 조경은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 조경이 아파트의 경제적 가치와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는 의미다.

소비자들의 요구가 섬세해지는 것에서도 조경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조경이란 요소가 처음으로 주목받기 시작할 때는 고가의 좋은 소나무를 심어 달라는 요구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단지를 순환할 수 있는 산책로나 잔디광장 같은 개방된 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식으로 입주민들의 삶과 연결된 구체적인 요구를 많이 받는다. 과거에는 특정 아이템을 요구했다면 지금은 특정 공간 조성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9년 입주한 서울 서초구 반포동 '반포자이' 단지 내 미니카약장 / GS건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초그랑자이 단지 내 팽나무 / GS건설
서울 서초구 방배동 방배그랑자이 조경 / GS건설
경기 안산시 상록구 안산그랑자이 단지 내 조경 시설인 스칸디파크밸리의 모습 / GS건설

―조경의 구성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선 조경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조경을 구성하는 요소는 매우 다양하다. 크게 수목과 초화류(草花類·꽃이 피는 종류의 풀)로 나뉜다. 수목 중 교목(喬木·높이가 8m를 넘는 나무)은 단지 경관의 골격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관목(灌木·키가 작은 나무)과 초화류는 계절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재료다.

조경은 적재적소에 배치되는 수목과 초화류, 어린이 놀이터나 수경시설 등의 시설물들이 어우러져 완성된다. 모든 요소들이 조화를 잘 이루기 위해 나무 한 주를 심더라도 어떻게 배식할 것인지, 놀이터와 운동시설 등을 계획할 때는 세대 간의 사생활 침해 문제는 없는지 등 고민할 점이 많다.

다양한 요소들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이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골격을 잡아주는 수목의 배식이라고 생각한다. 수목의 배식은 집을 떠받치는 뼈대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 최근 조경 트렌드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공공의 성격이 강하고 넓은 공간을 차지하던 공원 같은 조경에서 프라이빗한 정원 형태의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확산으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면서 더 사적이고 더 소규모를 위한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최근 아파트 조경은 자연과 호흡할 수 있도록 하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여행에서 느낄 수 있던 감성까지 더해지길 바라는 이들도 많다. 리조트나 호텔 같은 편안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조경이 점차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조경 아이템도 바뀌기 시작했다. 벤치 소재가 목재 등 한국적인 소재에서 철재, 라탄(등나무) 소재 등으로 변한 게 대표적이다. 이전에는 벤치, 테이블 등 가구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켰다면, 이제는 이용자들이 필요에 따라 가구의 위치를 바꿀 수 있도록 있도록 별도의 고정 작업을 하지 않는다.”

― 조경도 단지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나

“우선 지역마다 생육 가능한 수목이 다르다. 대전을 중심으로 이남과 이북 지역으로 나눈다. 이북지역인 서울에는 자작나무 등 추위에 강한 나무들을 많이 사용하고, 이남 지역에는 배롱나무, 물푸레나무과의 목서를 사용한다. 하지만 최근 기후 변화에 따라 지역별로 사용되는 나무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는 추세다.

조경 트렌드도 지역에 따라 다르다. 유행의 중심인 서울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자연적 요소를 관망하는 조경이 유행하다가 텃밭 등 체험형 조경이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다시 체험 시설물이 줄고 조경을 관찰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있다. 지방에서는 여전히 체험형 조경이 인기다. 서울에서 유행하던 디자인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시간에 따른 차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단지 간 차이를 최소화하려고 한다. GS건설은 다른 건설사와 다르게 프리미엄 아파트 브랜드가 없다. 자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아파트 단지의 조경을 최고 수준으로 조성한다. GS건설은 ‘자이 조경디자인 매뉴얼’을 갖고 있어서, 어떤 단지를 가더라도 공통된 컨셉이 있어 여기는 GS건설에서 시공을 했구나라고 알 수 있다.

자이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엘리시안 가든이 있다. 엘리시안 가든은 이상향의 파라다이스를 뜻하며, 제주 경관을 모티브로 제주 팽나무와 화산석을 활용한 정원이다. GS건설에서 시공한 아파트에는 모두 적용돼 있다.”

― 어쩌다가 제주 팽나무가 아파트 단지까지 진출하게 됐나

“모든 아파트 단지 조경은 큰 틀에서는 비슷하지만, 각 건설사만의 시그니처 아이템이 있다. 엘리시안 가든을 고안해 낸 건 10여년 전이다. 당시 GS건설이 운영하는 엘리시안 제주CC를 휴식할 겸 방문했는데, 입구부터 심어져 있는 팽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팽나무는 제주 바닷바람을 맞고 자라 가지가 많이 휘어있다. 그동안 봐왔던 조경수들과 전혀 다른 형태였다.

문득 팽나무를 GS건설 조경의 상징수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팽나무가 서울에서도 생육 가능한지 확인해봤더니, 바람과 추위에 강해 서울에 심어도 죽지 않는다고 했다. 팽나무를 활용하기로 마음 먹고, 화산석 등을 이용해 팽나무가 자라던 제주도의 환경을 조경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엘리시안 가든이란 이름도 엘리시안 제주에서 가져왔다.”

― GS건설 조경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GS건설은 자이라는 아파트 브랜드를 출시한 이후, ‘숲’이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조경을 계획했다. 여기서 말하는 숲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나무가 우거진 숲이 아니다. 초화류, 관목 등 다양한 수종을 활용한 다층식재를 의미한다.

숲에 있는 길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사람이 숲 속의 길을 걷다 보면, 발걸음 가까이로 예쁘게 핀 꽃을 볼 수 있다. 그 뒤로는 키가 작은 관목이 있고, 높이가 2~3m 되는 중교목이 차례대로 심어져 있다. 이를 아파트 단지 조경으로 가져왔다.

다층식재를 구현하는 데 더해 각 식물의 생장시기를 고려한 설계를 했다. 1년을 일곱개의 계절로 쪼개서 식물을 배치했다. 1년은 4계절로 이뤄졌지만, 같은 봄이라도 초봄과 늦봄에 볼 수 있는 식물이 다르다. 1년을 7계절로 쪼개면서 조경 만으로도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 조경 담당자의 덕목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조경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양하다. 조경 담당자라면 각 요소간의 조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는 자연 속에서 조경에 접목할 수 있는 아이템을 발굴하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물론 조경에 적용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는 안목이 처음부터 생기는 건 아니다. 그래서 신입들이 오면 많이 놀러다니라고 말한다. 놀이공원, 수목원, 산, 바다. 이렇게 다양한 공간을 다니다보면 어느 순간 특정 아이템이 눈에 들어온다. 고궁에 있는 연못과 정자가 한 때는 유행이었다. 이 또한 조경 담당자가 경험을 통해 발견한 아이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