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임대차법(계약갱신청구권·전월세상한제·전월세신고제) 시행 이후 서울 등 주요 지역 아파트 전세 시장에서 ‘이중가격’ 현상이 고착화한 가운데, 전세보증금이 계단식으로 형성되는 ‘삼중가격’까지 나타나고 있다. 새 임대차법 시행 1년이 넘어가면서 새로운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다.

3일 오후 서울 노원구 한 부동산 매물 안내판이 비어 있다. / 연합뉴스

9일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서울 송파구 잠실동 잠실엘스 전용 84.88㎡ 17층은 지난달 3일 보증금 8억6100만원에 전세 계약이 체결됐다. 같은 날 15층은 13억7000만원에, 지난 6월 13층은 11억5000만원에 전세 거래가 이뤄졌다. 같은 면적, 비슷한 층수임에도 가격대가 8억·11억·13억으로 나뉜 것이다.

업계에서는 8억원대 거래는 기존 계약을 갱신한 것이고, 13억원은 신규 전세 계약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두 전셋값 사이의 11억원대 전세 계약은 세입자가 주변 전셋값이 너무 오른 것을 감안해 집주인의 전셋값 인상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해 새 계약을 한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다른 단지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서울 강동구 고덕그라시움 84㎡ 3층 전세는 지난달 13일 11억원에, 같은 달 28일에는 10층이 5억7750만원에 각각 계약됐다. 지난 6월19일에는 같은 평형 7층이 8억5000만원에 전세 거래됐다. 전용 59.79㎡도 7월 한달 간 비슷한 층수가 4억2000만원·6억원·8억원에 전세 계약됐다.

노원구 월계동 삼호 3차의 경우 전용 59.22㎡ 비슷한 층수 전세 보증금이 6000만원 간격을 두고 형성돼 있다. 지난달 23일 1층이 전세 보증금 2억6000만원에 거래됐는데, 약 일주일 전엔 17일에는 같은 1층이 3억2000만원에 전세 계약됐다. 같은달 14일 2층은 1억8500만원에 전세 거래됐다.

전문가들은 작년 7월부터 시행된 새 임대차법이 삼중가격을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임대차법에 따라 세입자는 임대차 계약 만기가 도래하면 2년간 1번 더 전세로 살 수 있는 갱신권 행사가 가능해졌다. 임대료는 직전 임대료의 5% 이내로만 올릴 수 있어, 상대적을 세입자에게 유리한 편으로 알려졌다.

단, 집주인이 ‘실거주’를 이유로 계약갱신을 거부할 수 있다. 이미 주변 전세가격이 기존 가격의 2배 가까이 오른 상황에서, 집주인이 실거주를 명분으로 보증금 인상을 요구하면 계약 연장이 필요한 세입자 입장에서는 전세 보증금을 인상할 수밖에 없다. 기존 집주인과 시세의 60~80% 수준의 보증금으로 신규 계약을 맺는 것이다.

실제 온라인 카페에서는 집주인이 전세보증금 인상률을 5% 이상 요구한다는 글들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성동구 맘카페 한 이용자는 “전세계약 만기가 다가오는데 집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5%를 훌쩍 넘는 20% 올려달라고 한다”면서 “거부하자니 본인들이 들어오겠다고 할까봐 난감한 상황”이라고 했다.

박합수 KB국민은행 수석부동산전문위원은 “세입자 입장에서는 보증금을 인상하지 않을 경우 집주인이 실거주를 하겠다고 나서면 수억원을 더 마련해 이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서 “임대차법이라는 게 결국 약자인 세입자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실제로는 세입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피해를 볼 수밖에 없게 됐다”고 했다.

고준석 동국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는 “우리 법에서 보장하는 계약자유원칙을 정부 스스로 깨고, 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면서 임대차법망을 피하는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면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생겨난 이중가격 현상이 현재 전국 곳곳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삼중가격 현상도 점차 확산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사업이 활성화돼야 신규 공급이 생기고, 전세 매물도 많이 늘어난다”면서 “단기적으로는 보유세를 완화해 전세의 월세화를 막아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