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국정감사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기업인 증인이 출석하게 됐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국감을 앞두고 기업 최고경영자(CEO)나 총수를 마구잡이로 부르지 말라는 지침까지 내렸지만, 여야 강경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선명성 경쟁 속에 또다시 기업인 국감 줄출석이 현실이 됐다.
2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지난 1일 전체회의를 열고 국감 일반 증인으로 53명을 의결했다. 행정안전부와 경찰청, 소방청, 서울시 등이 주요 피감기관인 행안위는 특성상 기업인 증인을 많이 부르지 않지만 이번 국감은 다르다.
행안위가 의결한 국감 증인 출석요구 명단을 보면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유영상 SKT 대표, 김영섭 KT 대표, 조좌진 롯데카드 대표, 김태영 21그램 대표, 이한우 현대건설 대표, 이재용 현대차그룹 사업관리팀장, 김동명 LG에너지솔루션 대표, 현신균 LG CNS 대표, 배문찬 이피코리아 대표, 정종표 DB손해보험 대표, 구본욱 KB손해보험 대표, 황도연 당근마켓 대표 등이 이름을 올렸다.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와 박종태 한화이글스 대표도 있다. 업종과 기업 규모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기업 총수와 CEO가 모두 행안위에 나서게 됐다.
행안위가 기업인들을 부르는 이유도 다양하다. 개인정보 유출 사태와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등 굵직한 현안도 있지만, 용산 관저 집무실 이전 관련 질의와 용산 과저 공사 하도급법 위반 혐의, 풍수해 보험 등을 신문요지 및 신청이유에 적은 의원들도 있다.
한 기업 대관 담당자는 "이번 국감은 여당 지도부가 기업인 출석을 최소화한다고 해서 기대가 컸지만, 오히려 여야 의원들이 경쟁적으로 증인 신청을 하면서 기업인 증인이 사상 최대 규모가 됐다"고 말했다.
기업인 증인이 가장 많았던 지난해 국감에서는 17개 국회 상임위를 통틀어 159명의 기업인 증인이 신청됐다. 올해는 이미 이 숫자를 뛰어넘었다. 조선비즈가 1일까지 증인 채택을 끝낸 13개 상임위 증인 명단을 분석한 결과, 총수와 CEO, 임원 등 기업인 증인은 189명(중복 포함)이었다. 아직 증인 명단을 확정하지 못한 상임위도 있기 때문에 역대 최초로 200명을 넘을 수도 있다는 전망도 있다.
총수 일가를 증인으로 부르는 관행도 여전하다. 주요 대기업 총수 가운데 이번 국감 증인으로 채택된 이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해욱 DL그룹 회장, 허윤홍 GS건설 대표,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등이다.
최태원 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한 정무위는 SK그룹의 계열사 부당 지원 실태를 점검하기 위해 최 회장을 부른다는 계획이다. 최 회장이 증인으로 채택된 10월 28일은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기간이다. 최 회장은 APEC CEO 서밋 의장을 맡고 있어 일정이 겹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용진 회장은 산업부 종합감사에 증인으로 채택됐는데 신세계가 중국 알리바바와 설립한 합작 법인과 관련한 질의가 예상된다. 정의선 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한 행안위는 이수기업 집회와 관련해 질의한다는 계획이다. 산자위 소속 한 의원 보좌관은 "정용진 회장이나 정의선 회장 모두 국감에 총수를 직접 부를 만한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토교통위는 10대 건설사 대표 가운데 8명을 증인으로 불렀다. 여러 차례 산재가 발생해 논란이 됐던 포스코이앤씨의 송치영 사장뿐 아니라 대형 건설사 대표는 대부분 증인으로 부른 것이다. 별다른 산재 없이 현장을 잘 관리하는 건설사 대표까지 부른 것을 두고 기준이 뭐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기업 대관 담당자들은 이번 국감은 예년과 달리 국민의힘이 기업인 증이 신청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총수와 CEO 증인 채택을 방어하는 전략이 틀어졌다고 말했다. 보통은 민주당 의원실이 기업인을 부르자고 하면 기업 대관 담당자들은 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증인 채택을 보류하거나 규모를 줄여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국민의힘이 먼저 기업인 증인 채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여야 간에 경쟁적인 분위기가 연출됐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소속 한 의원실 보좌관은 "국정감사 후반부 증인은 추가로 채택할 수 있다"며 "국감 기간 여야 간 정쟁이 본격화되면 추가 증인 신청도 더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