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관세협상 및 방위비 관련 브리핑을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뉴스1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이 나흘 간의 방미 기간 동안 미국 측 핵심 인사인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 겸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대통령실은 유선 협의를 진행했다고 밝혔지만, 미국까지 가서 나흘을 기다리고 얼굴 한 번 못 봤다는 점에서 아쉬운 결과라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 워싱턴DC에서 25일 열릴 예정이던 한미 재무·통상 수장의 '2+2' 협의도 이날 미국 측의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으로 취소됐다. 한미 관계에 이상기류가 생긴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24일 대통령실과 정치권에 따르면, 위성락 실장은 마코 루비오 장관을 만나지 못한 채 이날 귀국한다. 위 실장은 지난 20일 미국으로 향했다. 한미 간 통상 협상의 활로를 뚫기 위한 차원이었다.

미국은 8월 1일부터 한국산 수입품에 25%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예고한 상황이다. 일본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관세율을 15%로 낮췄고, 유럽연합(EU)도 15% 상호관세 타결에 임박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의 주요 동맹이 상호관세 협상에서 진전을 보이는 가운데 한국만 이렇다할 소식이 없던 상황이다.

우리 정부는 위 실장을 비롯해 외교, 경제, 통상 분야의 고위급이 미국에 총출동해 관세 협상에 나설 참이었다. 하지만 관세협상의 키맨으로 불리는 루비오 장관을 만나는 데 실패한 것으로 확인돼 관세협상은 물론이고, 한미 관계 전반에 빨간 불이 켜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대통령실은 위 실장이 루비오 장관을 만나지 못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자 이례적으로 위 실장의 구체적인 동선을 밝히며 진화에 나섰다. 대통령실은 "위 실장은 21일 오후 루비오 보좌관을 만나기 위해 백악관 웨스트윙에 방문했고, 미국 NSC 내 고위 인사인 베이커 국가안보부보좌관 겸 부통령 국가안보보좌관과 니담 국무장관 비서실장도 동석하고 있었다"며 "면담 직전에 트럼프 대통령이 루비오 보좌관을 긴급 호출함에 따라 우선 루비오 보좌관을 기다리며 동석자들과 한미 간 현안에 대한 충분한 의견 교환과 입장 전달을 했다"고 밝혔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4일 오전 미국 측의 일정 변경으로 인해 출국이 취소되자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을 나서고 있다./뉴스1

위 실장과 루비오 장관의 만남이 불발된 것은 대통령실도 인정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루비오 보좌관과 트럼프 대통령 간의 회의가 길어져 참석할 수 없게 됐다"며 "추가 협의를 진행하기로 했지만, 22일 루비오 보좌관 측으로부터 미-필리핀 정상 행사 등으로 대면 협의가 어려우니 유선 협의를 진행했으면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결국 위 실장과 루비오 장관의 협의는 유선으로 진행됐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루비오 보좌관은 세 차례나 사과를 했고, 협의한 내용을 트럼프 대통령과 관계 장관과도 충실히 공유하겠다고 설명했다"고 덧붙였다.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한미 재무·통상 수장의 '2+2' 협의도 돌연 취소됐다. 미국의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의 긴급할 일정으로 취소됐다는 것이 기획재정부 설명이다. 하지만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공항에서 대기하던 도중 일방적으로 협의 취소 소식을 전달받았다는 점에서 외교적 결례라는 지적이 나온다. 구 부총리를 수행하는 강영규 기재부 대변인은 인천공항에서 기자들을 만나 "연락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미국 측으로부터 오늘 아침에 연락이 왔다"고 전했다.

민정훈 국립외교원 미주연구부 교수는 "'2+2 협의' 같은 경우 조율된 일정을 마지막 순간에 일방적으로 연기했기 때문에 일상적인 일로 보기는 어렵다"며 "우리가 한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올코트 프레싱'을 하는 모습을 보이다 보니 일정 조율에서 엇박자가 난 것이 아닌가 싶다"고 밝혔다.

야당은 미국 측이 이재명 정권을 불신하고 있다는 증거라며 공세를 이어갔다. 송언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재명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중국 전승절 참석 검토, 대북 확성기 중단 등으로 한미동맹의 신뢰를 흔들었다"며 "G7에서의 한미 정상회담 불발, 나토 정상회의 불참으로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다. 이번 협상 취소까지 이어지면서, 미국 측이 이재명 정권을 불신하고 있다는 의구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