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의원입법 남발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입법영향분석’ 제도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입법영향분석은 법 시행 후 사회 각 분야에서 예상되는 전반적인 영향을 과학적 방법으로 예측 및 분석하는 제도다. 최근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타다금지법’ 및 헌법재판소 위헌 판결을 받은 ‘윤창호법’ 등으로 사회적 대가를 치른 만큼, 법 시행 전 충분한 분석을 제도화하자는 취지다.
21일 국회에 따르면, 국회입법조사처 산하 과학입법지원센터는 지난 19일부터 입법영향분석 도입을 위한 사전 교육에 돌입했다. 분석 과정에 필수적인 챗GPT 활용법과 공간데이터 분석기술 등의 전문가들을 섭외해 한 달 이상에 걸쳐 집중 교육을 하는 것이다.
주 강연자로는 신동욱 AI 인터시스 대표, 정진교 한국미래인재능력개발원 선임연구원, 유병원 국립공원공단 과장 등을 초청했다. 향후 입법조사처는 산업연관분석과 비용편익분석, 법경제학 교육 등도 추가로 진행한다.
내달 24일 입법조사처 산하 입법영향분석단은 한국법제연구원과 학술세미나도 연다. 한국법제연구원은 입법정책수립 지원 목적의 국무총리 산하 전문연구기관이다. 지난 17일에는 세계 24개국 의회조사기구 대표단을 초청한 국제 세미나도 열었다. 미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입법영향분석 사례가 공유됐다.
입법영향분석은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률안 가운데 규제를 신설·변경·연장·폐지하는 내용의 법을 대상으로 한다. 법안 논의 과정이나 제도 시행 이후 비(非)규제 법률안까지 분석 대상에 포함하는 안도 논의될 수 있다. 경제·산업분야에선 일자리와 고용 시장, 사회·문화 분야에선 사회안전망과 환경, 정치·행정분야는 사법제도 및 형사정책 등에 미칠 영향을 계측한다.
절차는 ▲의원이 법률안을 발의해 입법영향분석서 작성을 요구하면 ▲입법조사처가 국회사무처 법제실과 협업해 상임위 심사 전까지 입법영향분석서를 제출하고 ▲상임위는 이를 참고해 법률안을 심사한다. 입법조사처는 법 시행 후 예상되는 영향을 예측·분석하고, 법제실은 법률안과 헌법 및 다른 법률이 상충되지 않는지 확인한다.
국회가 입법영향분석 제도화를 추진하는 배경에는 입법으로 사회적 혼란과 비용이 수반되는 것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공감대가 있다. 의원입법, 특히 규제입법은 늘어나는 반면 사전에 검증할 기구가 없기 때문이다.
국회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19대 국회 때 1만6729건이었던 의원입법은 21대 국회에서 2만3262건으로 늘었다. 전체 2만4363건의 법률안 중 97%가 의원입법이다.
정부가 법안을 발의하려면 규제영향분석 절차를 거쳐야 한다. 행정규제기본법에 정부입법의 사회·경제적 영향분석 의무화를 명시하고 있다. 입법에만 최소 6개월이 필요하다. 반면 의원입법은 이런 의무가 없다. 국회법상 대표 발의자 포함 10명 이상 서명만 받으면 된다. 발의 후 소관 상임위원회에 상정해 논의할 수 있다.
여야 정당이 현역 의원의 법안 발의 건수 등을 총선 공천 평가에 활용하면서 입법 남발 현상은 극심해졌다. 이렇다 보니 법 시행 시 생길 사회·경제적 부작용을 충분히 계측하지 않은 채 ‘부실 법안’이 통과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대가를 치른 사례도 많다.
사법부가 무죄라고 인정한 혁신 스타트업을 법으로 규제해 경쟁 시장을 무너뜨린 ‘타다금지법’이 대표적이다.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인 피의자가 ‘윤창호법’ 위헌 결정으로 재판에서 감형 받는 일도 있었다. ‘게임셧다운제’의 경우, 모바일 게임은 규제하지도 못하면서 글로벌 성장 가능성이 큰 국내 게임 산업만 위축시켰다. 결국 2021년 11월 폐지됐다.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정을 내린 건도 해마다 늘고 있다. 2019년 5건이던 위헌 법률은 올해 9월 기준 25건으로 뛰었다. 헌법불합치 결정도 2019년 1건에서 올해 7건이 됐다.
국회의장과 여당 원내대표가 21대 국회 마지막 정기국회에서 나란히 입법영향분석 도입을 언급한 것도 이런 이유다.
김 의장은 지난달 1일 정기국회 개회사에서 “국회 본연의 일인 입법의 질을 높이기 위한 준비에도 박차를 가할 것”이라며 “입법조사처 등 전문 인력이 참여한 입법영향분석이 좋은 입법을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윤 원내대표도 같은 달 20일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국회 입법의 품질을 높여야 한다”며 “의원 입법도 정부 제출 법안처럼 사전에 규제 영향을 분석하는 ‘의원 입법 영향 분석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런 내용을 담은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해놓았다”고 했다.
입법영향분석 관련 국회법 개정안은 현재 소관 상임위인 국회 운영위 소위원회에 상정돼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윤 원내대표가 대표발의한 법안과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대표발의안 등이 있다. 여야 모두 입법의 질을 높일 제도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는 의미다.
소위 차원의 논의는 올해 8월 23일까지 두 차례 있었다. 회의에선 국회의원 입법권의 축소에 대한 일부 우려와 제도 수정 및 보완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 소위 위원장인 이양수 국민의힘 원내수석부대표는 “제도 도입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어서 심사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었다.
박상철 국회입법조사처장은 조선비즈에 “과잉 입법, 부실 입법을 해소하려면 ‘입법 과학화’를 위한 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입법영향분석 법제화는 ‘정치의 영역’에 머물던 법을 ‘과학의 영역’으로 만드는 것이자, 제22대 국회를 위한 미래 유산”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