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부터 조합원 수 1000명 이상의 대형 노동조합이 회계 결산보고를 공시하지 않을 경우 조합원들이 낸 노조비에 대해 연말정산에서 세액공제를 받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예고했다. 노동계의 반발이 거센 가운데 야권은 '회계 투명성'을 높이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정치·사회적 합의가 없는 시행령 입법예고는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외국 사례를 보면 미국과 영국 등은 노조가 재무 현황, 임원 보수 등이 담긴 보고서를 매년 행정 관청에 제출해야 한다. 노조 회계 투명성이 강한 것이다.
18일 정부에 따르면 조합원 수가 1000명이 넘는 대형 노조가 결산서류를 공시하지 않으면 2024년부터 조합원을 비롯해 산하 노조까지 조합원들이 낸 조합비를 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한다. 고용노동부와 기획재정부는 지난 15일 이런 내용을 담은 노동조합법 시행령과 소득세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현재 노조 조합비는 소득세법상 '기부금'에 해당된다. 노조비를 낸 사람은 연말정산을 할 때 15%의 세액공제를 받는다. 문제는 다른 기부금 단체와 달리 현재 노조는 대외적으로 회계 내역을 공시할 의무가 없다는 사실이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노조도 정부 회계공시 시스템에 매년 4월 30일까지 회계를 공시해야 한다. 이번에 입법예고한 개정안은 오는 8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내년 1월 1일 시행될 예정이다.
◇ 尹정부 노동개혁 뒷받침 법안 발의… 정치·사회적 합의 부재로 인한 진통 전망
정부 차원에서 시행령 개정을 발표한 것에 더해 국회 국민의힘 노동개혁특별위원회 간사인 김형동 의원은 최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에는 노조 회계 공시시스템을 활용해 규약, 조합원 수, 결산서류 등을 자율적으로 공시하도록 하는 조항이 신설돼 있다.
이때 기본적으로 공시 자율권을 보장하되 ▲대통령령으로 정한 일정 규모 이상의 노조·산하조직 조합원 과반수 이상이 회계공시를 요구한 경우 ▲최근 5년 이내 횡령·배임 등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하는 사항이 발생한 노조·산하조직에 고용노동부장관이 회계공시를 요구한 경우 등에 한해 회계공시를 하도록 규정했다. 노조의 재정·회계적 책임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회계감사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고자 노조 규약에 '회계 감사원의 자격과 선출에 관한 사항'도 포함했다. 회계감사원 자격은 회계 관련 지식 및 경험 등 직업적 전문성을 가진 사람으로 명시했다. 노동개혁이라는 윤 정부의 국정과제를 입법차원에서 뒷받침하겠다는 의미다.
정부의 시행령 개정과는 달리 법안 개정은 여야 합의가 돼야 한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국회 통과가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김 의원은 조선비즈와의 통화에서 "안 된다고만 하는 야당을 설득해야 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먼저 할 수 있는 것을 파악해 시행령 입법예고를 발표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국민 세금이 일부라도 들어간다면 관련 회계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법 통과를 위해 야당을 설득하겠지만 안 될 경우의 정치적 책임은 오롯이 야당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도 노동조합 회계에 대한 감사 규정을 강화한 이른바 '노조 깜깜이 회계 방지법'(노동조합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노동조합 회계감사자의 자격을 공인회계사 등 법적 자격 보유자로 규정하고, 노조 내 회계 담당은 감사업무에서 배제하도록 규정한 것이 골자다.
현행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는 노조 대표가 회계감사원으로 하여금 노조의 모든 재원과 용도, 주요 기부자 이름 등에 대한 회계감사를 실시하게 하고 그 결과를 전체 조합원에게 공개하도록 하고 있지만 정부가 노조의 재정 운영 투명성을 관리·감독할 근거 규정은 없다.
야당에서는 '노조 재정의 투명성 강화'라는 취지에는 일부 공감하지만, 정치·사회적 합의 없이 정부 차원에서 강하게 밀어붙였어야만 했는지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입장이다. 당장 해당 시행령으로 영향을 받을 노동계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가보조금을 받는 단체의 경우에는 정부도 세금이 어디에 쓰였는지 알 권리가 있다는 점에서 관련 투명성을 요구하는 게 적절해 보인다"면서도 "다만 정부 차원의 직접 관여에 대한 여야의 합의가 없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동의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노동계는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우리 사회 각 조직의 회계 투명성 제고에 찬성한다"면서도 "개정안의 목적은 '지원'이 아닌 '협박'"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위헌성 여부를 정식으로 문제 제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법률의 위임과 근거 없이 노동기본권을 침해한 개정안이자 헌법과 노동관계법의 취지를 거스른 시행령"이라고 했다.
◇ 선진국은 노조 회계 투명성 위해 법안 마련… 전문가들 "사회적 합의 노력도 필요"
상당수 선진국에서는 노조 회계를 투명화하기 위한 법적 장치가 이미 마련돼 있다. 법령 혹은 자치규약을 통해 관련 회계감사 결과를 공개하고 있다. 특히 이들 국가도 노조를 세금으로 지원하기도 하고, 조합비 중 일정 금액을 환급한다.
미국과 영국은 재무 현황, 임원 보수 등이 담긴 보고서를 매년 행정 관청에 제출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노사정보보고 및 공개법(LMRDA·Labor Management Reporting and Disclosue Act)'이다. 해당 법에는 '조합원과 대중의 이익을 해치는 다수의 노조 비리를 근절하고,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위해 노동단체 및 임직원에 대해 최고 수준의 책임과 윤리적 기준을 요구한다'는 법적 취지가 담겨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모든 노조가 '연차 회계보고서'를 노동부 장관에게 제출해야 한다. 조합원들에게도 회계보고서 사본을 제공하고, 언제든 노조원이 요구하면 열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노조는 연간 1만달러(약 1280만원) 이상을 주는 임직원의 이름·급여·직무와 연간 250달러가 넘는 지출의 사용처도 반드시 밝혀야 한다.
영국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통합법(TULRCA·Trade Union and Labour Relations Act)'을 통해 노조가 매년 행정관청에 대차대조표, 현금 흐름, 감사 보고, 간부 급여 내역 등이 포함된 연차보고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한다. 특히 회계감사에서 노조원 또는 노조 간부를 배제해 독립성을 확보하고 일정 규모 이상일 경우 공인회계사 감사를 통해 전문성까지 확보하도록 하고 있다. 아울러 조합원이 회계 접근조사를 신청하면 조합은 28일 내 반드시 응답해야 한다. 불응시 벌금형에 처한다.
일본은 회계감사가 강하다. '노동조합법'을 통해 노조는 모든 재원과 용도, 주요 기부자의 성명과 현재의 경리 상황을 나타내는 회계보고를 최소 매년 1회 조합원에게 공표해야 한다. 또 조합원이 위촉한 '직업적 자격이 있는 회계감사인'이 확인해 주는 증명서를 첨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 법령이 아닌 자치규약을 통해 노조의 회계감사를 관리하고 있다. 이 경우에도 재정정보를 상시 공유하고, 포괄적인 업무에 대한 감사를 통해 노조 자체적인 재정 투명성 제고를 유도한다.
전문가들은 노동개혁이 윤 정부의 핵심 국정 과제인 만큼 노조 회계 투명성 강화를 위한 드라이브는 더 강해질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정치·사회적 합의 없는 개혁은 갈등만 증폭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는 "과격 노조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해소하고 정부가 공약한 '일자리 개혁'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며 "정부 보조금을 받는 입장에서 노조 회계공시는 당연히 시행돼야 하지만, 실제 비리의 뿌리가 뽑힐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반면, 김성희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 교수는 "해외 사례를 참고는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와 해외 노동시장 구조가 달라 무조건 똑같이 적용할 순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행정명령으로 강제할 경우 사회적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교수도 "법률이 아니라 시행령으로 한다면 삼권분립이 보장된 민주주의에서 대통령이 월권한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