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간 협치가 사라지고 있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상임위별로 여야 간 합의를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거대 야당의 '본회의 직회부' 권한이 적용되는 경우가 늘어나는 모양새다. 국회법 제86조에 따르면 법안이 법사위에 '이유 없이' 계류된 지 60일 이상 지나면 소관 상임위원회 재적 위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본회의 부의(직회부)를 요청할 수 있다.
야당이 상임위원회 소위에서 단독 의결을 진행하거나 본회의 직회부 조항으로 본회의에 법안을 올리면 여당은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거론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형국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총선을 1년 앞둔 상황에서 이런 모습이 제21대 국회의 악습으로 자리 잡을 것을 우려한다.
25일 정치권에 따르면 본회의 직회부를 앞둔 여야 쟁점 법안들이 상임위별로 심심찮게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환경노동위원회의 '노조법 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이 있다. 지난 2월 21일 환노위를 통과했지만 60일 동안 법사위에 계류됐기 때문이다. 노란봉투법은 하청노동자와 간접고용노동자가 원청과 직접 교섭할 수 있게 하고(2조), 기업이 노동조합의 파업 등에 따른 손해배상청구를 금지하는(3조) 내용을 담고 있다.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3법 개정안(방송법·방송문화진흥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도 법사위 계류 기간이 국회법에서 정한 60일을 넘기면서 지난달 21일 민주당 주도하에 과방위에서 본회의 부의 요구안이 단독 의결된 바 있다. 이에 국민의힘은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과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내고 대치하고 있다.
현재 보건복지위원회 소관인 '간호법'도 본회의에 직회부돼 있다. 간호법은 지난 13일 본회의에 안건으로 상정하고자 했으나 김진표 국회의장은 "정부와 관련 단체의 협의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여야 협의를 거쳐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다음 본회의(27일)에서 처리해야 한다"며 안건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오는 27일 본회의에서 반드시 해당 법안을 처리하겠다는 입장이다.
민주당은 본회의에 직회부한 법안들은 민생과 직결된 법인 만큼 반드시 통과시키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양곡관리법부터 노란봉투법, 방송법, 간호법 등은 국민의 삶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국민적 관심도 많이 받고 있다"며 "본회의 직회부를 하는 건 우리도 부담이 있다. 그래도 민생과 관련된 만큼 신속한 처리도 고려해야 하지 않나 싶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본회의 직회부도 국회법에서 보장한 합법적 절차"라며 "민생을 챙기기 위해 올라온 법안이 상임위에서 여야 합의를 못 했다고 계류하다가 없어지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본회의에 올리고 처리하는 것도 여야 합의의 또 다른 과정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여야 협치 없이 본회의에 직회부된 법안들은 '본회의 직회부→거부권 행사'의 굴레에서 사실상 벗어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윤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법은 다시 국회로 돌아와 본회의 표결을 부쳐야 하는데 가결이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헌법 53조에 따르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이 다시 의결되려면 재적 의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의석 분포상 민주당·정의당과 야권 성향 무소속 의원 수를 모두 합쳐도 여당인 국민의힘(115석)이 '집단 부결'에 나서면 가결은 불가능하다. 결국 부결된 법안은 폐기되고 비슷한 류의 법이 다시 입법 발의되는 상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의 수순이 그렇다. 앞서 지난 13일 국회는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본회의 표결에 부쳤다. 그 결과 재석 의원 290명 중 찬성 177표, 반대 112표, 무효 1표로 부결됐다. 이후 민주당은 지난 14일 농해수위에 또 다른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입법하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해당 법안은 오는 5월 농해수위 전체 회의에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은 본회의에 직회부한 법안들이 여야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만큼 거부권 행사로 막겠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국민의힘 한 관계자는 "본회의 직회부로 가면 의석수로 야당에 밀릴 수밖에 없다. 양곡관리법 개정안 때 이미 모두가 보지 않았나"라며 "여야 합의 없이 본회의로 직회부한 법안들은 모두 재의요구권 행사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계속 되풀이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의힘의 한 초선 의원도 "협치가 됐든 안 됐든 일단 야당에서 숫자로 밀어붙이면 우린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재의요구권 행사를 건의하는 등 대통령에 부담을 주고 싶진 않지만 방법이 그것뿐"이라고 했다. 이어 "부결된다고 해도 다시 또 비슷한 류의 입법이 반복되고 있다"고 했다.
대통령실도 민주당이 강행 처리를 예고한 간호법·방송법 등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검토하고 있는 분위기다. 이와 관련해 윤 대통령도 지난 23일 방미를 하루 앞두고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하겠다"며 기존 입장을 재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양곡관리법 개정안 때처럼 여론 흐름을 살피는 등 신중한 태도를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본회의 직회부→거부권 행사'가 제21대 국회의 악습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우려한다. 협치를 위한 정치적 협상이 사라진 데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표심을 위한 입법 성과도 고려해야 하는 만큼 여야 모두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박상병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교수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는 극한 싸움으로 갈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 정부·여당도, 민주당도 서로 양보할 마음은 없고 누가 이기는지 보자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지 않나"라며 "본회의로 직회부한 법을 대통령이 거부하는 게 앞으로 남은 쟁점 법안에서도 반복될 게 분명하다. 서로가 최선에서 협상을 통해 차선책을 찾는 노력이 없다면 이는 악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여야 모두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쟁점 법안에서만큼은 자당에서 발의한 법안이 통과되는 게 지지층 표심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본회의 직회부와 거부권 행사 사이에서 법안이 폐기되고 다시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여야는 공수전을 펼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만 제22대 국회 정국에 따라 일명 '악습'이 된 이 문법도 사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