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가 6일 공개한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에는 한중수교, 그리고 이와 맞물린 한대만 단교, 한베트남 관계 개선 등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에 대한 주변국의 생생한 반응을 엿볼 수 있다.

박진 외교부 장관.(외교부 제공)

◇ 한중수교 견제한 대만... “양국 관계 유지되길 희망”

한중 수교가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을 직감한 대만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한중 수교가 불러올 파장에 대해 경고하고 이를 늦추기 위해 노력했다.

김종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 일행이 1992년 1월 26일부터 29일까지 대만 출장을 다녀와 작성한 보고서에는 한중수교에 대한 대만의 불안함이 드러난다.

이등휘 대만총통은 김 수석에게 “아시아에 남아있는 공산주의 세 나라(중국·북한·베트남)는 시간문제이지 저절로 넘어질 것이 확실하므로 대륙(중국을 지칭)과의 관계 개선에 속도를 늦춰 신중히 추진할 것”을 요청했다.

면담에 배석한 대만 첸푸 외교부장도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북방정책을 충분히 이해하나 만약 대륙과 수교한다고 하더라도 양국 관계가 현재대로 유지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에 한국은 “한중 수교를 인위적으로 시간적 목표를 정해놓고 추진하는 것이 아니고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게 추진하고 있다”며 대만 측에게 답했다.

이상옥 외무장관도 1992년 5월 아널드 캔터 미국 국무부 차관을 만난 자리에서 캔터 차관이 “중국 측이 관계 정상화 조건으로 중화민국(대만)과의 관계 단절을 요청할 경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라고 묻자 “매우 어려운 결정이며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사항”이라며 난감한 입장을 드러냈다.

대만의 우려대로 한국은 중국과 그해 8월 24일 수교했고, 수교 직전 대만에 단교 방침을 통보했다. 중국은 대외적으로 한중 수교가 역내 평화를 위한 결정이라고 강조했으나 내부적으로는 한국과 대만의 단교를 가장 큰 성과로 여겼다.

한중수교 체결 당시 중국을 방문했던 일본 후카다 의원은 중국 공산당 간부들이 “한국과 대만의 단교가 금번 한중 수교의 가장 큰 성과임을 솔직히 인정했다”고 중국 내 분위기를 한국대사관 측에 전했다.

◇ 북한 방문한 일 정치인 “한중수교에 북한 충격 커”

.(외교부 제공)

한국이 1990년 한러수교에 1992년 한중수교까지 체결하자 북한의 충격은 상당했다. 후카다 의원은 중국에 방문하기 전 1992년 8월 22일부터 이틀간 북한에 들러 김용순 당시 노동당 국제부장을 만났는데, 이때 후카다 의원은 한중수교 보도를 들며 사실관계를 북측에 문의했다.

김 부장은 이미 지난 4월 양상쿤 국가 주석의 “연내 한중수교 원칙에 대한 시사”가 있었다며 “수교 일자 통보는 약 1주일 전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중 관계는 혈맹 관계이므로 앞으로 계속 발전되어 나갈 것”이라고 답했다.

후카다 의원은 “한중 수교에 대해 북한 노동당 간부들은 애써 태연을 가장하려는 자세가 역력했다”고 상황을 전했다.

1992년 9월 18일 주 홍콩 한국총영사가 주 홍콩 일본영사로부터 들은 내용을 보고한 문서에도 “한중 수교 이후 김정일은 장시간의 내부 연설을 통해 일부 공산주의 국가들이 돈 때문에 공산주의 원칙마저 포기하고 있다는 등 중국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함”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 한베트남 관계 개선하자... 미국 “속도 조절 부탁”

외교문서에는 한베트남 관계 개선 움직임에 미국이 속도 조절을 주문한 정황도 담겼다. 1990년 12월 5일 박동진 주미대사가 리처드 솔로몬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 대화한 내용을 보면 솔로몬 차관보가 캄보디아 내전 종식을 위한 파리 회의 협상이 최종 단계에 와있다며 “베트남과의 관계 개선은 당분간이라도 자제하는 것이 필요하고 한국 정부의 배려에 감사하고 있다”는 말이 있다.

당시 캄보디아에는 베트남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는 미국과 베트남 관계 정상화에 최대 걸림돌이 됐다.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외무부가 1991년 10월 작성한 ‘한미 정상회담 전 검토 조치 사항’에 따르면 우리 측은 ‘캄보디아 사태가 해결됐으므로 베트남과 외교 관계를 수립 추진’이라는 입장을 정했다.

그러나 미국은 ‘캄보디아 평화 협정의 성실한 이행’ 등 관계 개선 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한국이 베트남과의 관계에 있어 계속 협조해 달라고 한 것으로 나타났다.

1992년 10월 24일 이 장관은 시착문 싱가포르 외무차관보를 만나 “한국과 베트남은 상호 연락 대표부를 설치키로 합의했다”며 “원래 베트남과 대사급 수교를 원했으나 미국이 금번 11월 대통령 선거 이후로 미뤄주도록 협조를 요청해와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 바도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