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내년도 첫 예산안 처리를 둘러싸고 국회 상임위원회 곳곳에서 여야 ‘예산 전쟁’이 본격화되는 모양새다. 이미 상임위별 예산소위에서 여야는 강대강 대치 끝에 파행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야당이 위원장으로 있는 소위에서는 단독으로 예비심사안을 강행해 의결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에 내년도 예산안의 법정 처리시한인 다음달 2일까지 본회의 처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17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특위) 예산안조정소위가 가동된 가운데, ‘거대 야당의 독주’라며 반발하며 삭감한 예산을 원상 복구하라는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의 대선 공약·주요 정책 예산 삭감을 주장하는 민주당의 충돌은 격화하고 있다. 특히 민주당이 ‘예산 칼질’을 한 예산안은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주요 정책 과제 예산이다. 이에 국민의힘은 거대 야당의 폭압적인 예산 삭감에 예산 사수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여소야대 구도 속에서 민주당과의 타협과 협조가 없는 이상 의석 수가 적은 여당은 당장 뾰족한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이날부터 시작된 예산안조정소위는 각 상임위별 예산안 예비심사 결과를 토대로 내년도 예산안의 최종 증감액 작업을 펼치는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다. 때문에 예산안조정소위는 여야 예산 전쟁의 ‘하이라이트’라고 평가된다. 문제는 여야가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올린 예산안이 예산안조정소위에서도 반복될 것으로 보여 ‘예산심의 파행’ 속출이 결국 법정시한 내 예산 처리 불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해졌다는 것이다. 예산안조정소위는 이날부터 우선 전체회의 의결을 마친 상임위부터 증감액 심사에 들어갈 계획이다.
상임위별 예산안 처리 현황(17일 기준)을 보면 총 17개 상임위 중 총 10곳(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문화체육관광위·국방위·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보건복지위·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환경노동위·법제사법위·행정안전위·여성가족위)이 내년도 예산안 예비심사를 마쳤다. 이 중 법사위와 외통위 등 2개 상임위와 정무위와 기재위는 여야 이견으로 전체회의를 넘지 못한 채 파행됐고, 아예 소위 구성도 못해 심사도 못한 사태까지 이어졌다. 국토위는 민주당 단독으로 예결소위에서 내년도 예산안을 의결했고, 전날 전체회의에서 파행된 행안위는 이날 다시 전체회의를 열고 간신히 예산안을 의결했다. 아직 예비심사가 진행 중인 7곳에서도 상임위별 예산결산기금심사소위원회 및 전체회의에서 여야 간 ‘파열음’은 여전한 상황이다.
실제로 여야 간 강대강 대치 끝은 상임위 파행으로 이어진 경우가 다수 발생했고, 야당이 위원장을 맡은 상임위는 소위에서 단독으로 예비심사안을 의결하는 등의 상황이 속출했다. 내년도 예산심의를 놓고 시작부터 여야 간 기싸움이 계속되는 형국이다. 지난 3일 법사위는 법무부·법제처·감사원·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헌법재판소·대법원 등의 내년도 예산안 상정을 안건으로 전체회의를 열고자 했지만, 여야 간사가 이태원 참사 관련 현안 질의와 관련한 의사일정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파행됐다.
외통위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지난 7일 외통위도 외교부 예산안을 놓고 끝내 합의하지 못하면서 파행됐다. 외교부는 윤석열 대통령 부부의 외교부 공관 입주로 외빈 리셉션 장소가 사라지자, 외교 네트워크 구축이라는 명목으로 리셉션 장소 건축에 21억7400만원의 사업비를 편성했는데, 이에 야당이 제동을 건 것이다. 야당은 대통령실 이전으로 발생한 비용으로 ‘꼼수 예산’이라며 해당 예산을 예산안 심사소위에서 삭감하고 단독 통과시켰고, 이는 결국 파행으로 이어졌다.
파행됐던 기재위는 전날 극적으로 각 소위를 구성하는 데 여야가 합의했다. 다만 이제 막 소위를 구성했기 때문에 기재위는 아직 내년도 예산안과 함께 처리될 부수 법안으로 지정될 세법 개정안 등을 논의조차 못한 상태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경제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반드시 세법 개정안이 통과돼야 한다는 입장이고, 야당은 정부의 세제 개편안을 ‘초부자 감세’로 규정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여야 간 첨예한 갈등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예산안 법정 시한 내에 처리하는 게 어려울 전망이다.
전날 전체회의 개회 40분 만에 파행했던 행안위는 이날 여야 간 극적인 합의로 내년도 행안부 예산안을 조정해 의결했다. 쟁점이었던 지역상품권 관련 예산 증액 규모는 축소됐고, 전액 삭감했던 경찰국 예산을 약 20%만 줄이는 것으로 합의한 것이다. 당초 경찰국 관련 예산은 야당이 단독으로 전액 삭감해 여야 예산 갈등의 불씨가 됐으나 상당 부분 정부 원안대로 두는 방향으로 정리됐다. 앞서 지난 9일 경찰국 예산안이 모두 삭감된 것이 발단이 돼 전날 행안위 소속 국민의힘 의원들은 퇴장했고, 민주당이 단독 의결한 예산안을 상정하지 않겠다며 정회된 뒤 파행된 바 있다.
여야가 합의에 이르지 못한 예산안은 예산안조정소위에서도 반복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내년도 예산안 법정처리 시한을 넘기는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이태원 참사’ 국가 애도 기간 등으로 이미 예년에 비해 심사 시작일이 일주일 이상 지연됐고, 예비심사를 아직 끝내지 못했거나 야당의 단독 처리로 올라온 예산안들은 여야 간 ‘예산 전쟁’을 재점화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은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선거(총선)를 앞둔 상황이라는 점에서 윤석열 정부의 내년도 예산 사상 초유의 준예산 사태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전망했다.
장성철 정치평론가는 “민주당은 윤석열표 정책 예산안 삭감을 소위 ‘이재명표 정책’ 예산 증액의 협상카드로 사용하고 있다. 민주당이 소위 ‘군기 잡기’, ‘길들이기’를 하는 것”이라면서도 “하나씩 봐야 하는 예산안들이 한두 개도 아닌 상황에서 당장 법정 시한인 12월 2일까지는 못 끝내더라도 12월 안으로는 무조건 끝내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2024년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들은 본인 지역구 예산을 이만큼 갖고 왔다고 해야 다음 선거에서도 본인 입지가 보장이 되는데, 제때 예산안을 처리하지 못해서 준예산으로 넘어가거나 후에 추경(추가경정예산)으로 이어지면 오히려 예산 협상을 못한 야당이 깝깝해지는 상황에 직면한다”고 강조했다.
신율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예산안을 놓고 상임위별 파행이 잇따르는 건 처음부터 상대가 좋은 쪽으로만 하는 것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해야 지지자들의 지지를 계속해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1년 후에 있는 총선을 염두에 둔 행동”이라며 “법안 처리 시한이 넘어가 사상 초유의 준예산이 편성될 수도 있다는 말도 나오는데, 오히려 준예산으로 되면 정부안이 자동으로 부의돼 본회의에서 부결시키는 상황이라 야당이 예산안 협상에서 키를 잃어 불리해진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민주당이 이번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 공개 이후 여론이 그리 좋지 못한 상황이라 이런 것까지 종합해보면 당 차원에서라도 지지율을 의식해서 무조건 어깃장을 놓기는 힘든 상황”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