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최근 정치권에서 가장 큰 화제를 뿌리는 인물로 자리잡은 가운데, 이른바 '싸가지론'도 주목을 받고 있다. 올해 37세인 이 전 대표가 '싸가지가 없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지지를 확보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천하람 국민의힘 혁신위원은 이 전 대표가 수준 높은 발언을 쏟아내는 데 대해 "'싸가지 없음'은 이 전 대표의 특성으로, 지지자들은 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치권에서 젊은 정치인이 '싸가지가 없다'며 비판을 받는 것은 한국 정치 역사와 함께 한다. 1970년대에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을 스타로 만들었던 '40대 기수론'도 원색적인 비난을 받았다. 국회 회의에서 "싸가지 없다"는 말이 등장하기도 했다.
◇42세 YS '40대 기수론' 치고 나오자 64세 유진산 "구상유취"
'40대 기수론'이 등장한 해는 1969년이다. 그해 11월 8일,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71년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신민당 유력 후보였던 유진산 총재는 64세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42세로 20살 넘게 어렸다. '40대 기수론' 깃발에 호응해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시 45세, 이철승 전 총재는 47세였다.
김영삼·김대중·이철승 세 명이 '40대 기수론'으로 바람을 일으키자, 유진산 총재는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는 정치적 미성년자들이 무슨 대통령이냐"라고 했다. 40세가 넘은 정치인들을 '젖비린내'라고 폄훼한 것이다.
'40대 기수론'이 더욱 확산되자 유진산 총재의 출마 가능성이 갈수록 낮아졌고, 대선 후보 지명권을 요구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경선은 이철승 전 총재가 사퇴한 가운데 2파전으로 치러졌고, 결국 2차까지 간 경선 결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후보로 지명됐다. 당시 '40대 기수론' 중 한 명이었던 이철승 전 총재의 딸이 이양희 국민의힘 윤리위원장이다.
◇20세기 마지막 해, 39세 野 여성 의원에게 "싸가지 없는 X"
국회에서 "싸가지 없다"는 발언이 공개적으로 나오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를 맡고 있던 1999년 12월, 국민회의의 국창근 의원(당시 60세)이 야당인 한나라당 초선 김영선(당시 39세)의원에게 한 말이다.
당시 국회 정무위원회 김중위 위원장이 "여야 간 이견이 있는 부패방지법은 나중에 심의하자"고 하자, 국민회의 간사였던 국 의원이 "왜 또 연기야. 위원장 똑바로 해"라는 등 고함을 쳤다. 한나라당 간사 김영선(金映宣) 의원이 "이런 분위기에서 회의를 못 한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국 의원이 김 의원을 향해 "싸가지 없는 X이", "딸뻘밖에 안 되면서", "너는 따귀 서너대는 맞아야 해" 등 폭언을 하고, 때리는 시늉도 했다고 한다.
당시 '싸가지 없는 X'라는 말을 들었던 김영선 의원은 이후 임시직이기는 하지만, 한 달 짜리 당 대표도 지냈고, 올해 6·1 재보궐선거에서 경남 창원의창에서 당선돼 국회로 돌아왔다. 10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이번 당선으로 5선이 돼 당내 최다선 의원이다.
◇86그룹, '싸가지론' 시달려…文 "'싸가지 없는 진보' 안 돼"
'싸가지 없다'는 평가를 받은 정치인 중 대표격은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다. 2003년 개혁국민정당 소속으로 재보궐선거에 당선돼 국회 첫 등원할 때 유 전 이사장은 캐주얼 재킷에 노타이, 흰색 바지 차림이었다.
이 옷차림으로 의원선서를 하기 위해 본회의장 단상에 올랐을 때 "저건(옷차림은) 예의가 아니다. 국민에 대한 예의", "국회가 이게 뭐냐", "퇴장시키자 등 고성과 야유가 쏟아졌다.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은 유 전 이사장의 옷차림에 항의하며 본회의장을 나갔다. 결국 박관용 당시 국회의장이 유 전 이사장의 옷차림을 지적하며 의원선서를 하루 미뤘다. 유 전 이사장은 이튿날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의원선서를 마쳤다. 이때 "문화적으로 너무 옹졸하다. 섭섭하다"고 했다.
이처럼 민주당 '86그룹(80년대 학번, 60년대 생)' 의원들에게는 '싸가지 없다'는 평가가 따라다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4년 강연에서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소속 광역의원들에게 "품격 있는 정치로 바뀌어야 한다. 특히 '진보는 싸가지 없다'는 이미지를 청산해야 한다"고 했다.
문 전 대통령은 2013년 펴낸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는 '우리(민주당)의 행태'에 대해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할 때"라며 "우리의 이념, 정책, 주장 자체가 아니라 그걸 표현하는 '태도' 때문에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그건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이준석, 윤핵관 측 공세에 '싸가지론'으로 역공
이 전 대표가 과거 정치인들과 다른 점은, '싸가지론'을 이용해 '윤핵관(윤석열 대통령 측 핵심 관계자)'의 공세에 반격한다는 것이다.
이 전 대표는 6·1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후 우크라이나로 떠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등과 만나고 복구 협력을 논의한 후 귀국했다. 당시 정진석(62) 의원이 이 전 대표의 우크라이나 방문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또 서로 지방선거 공천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이 전 대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는 어록을 인용해 정 의원을 비판했고, "정치 선배의 우려를 개소리로 치부하는 만용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냐"고 했다. 그러자 이 전 대표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 페이스북에 "흔들고 가만히 있으면 더 흔들고, 흔들고 반응하면 싸가지 없다 그러고. 자신들이 대표 때리면 훈수고, 대표가 반박하면 내부총질이고"라고 적었다.
이후 이 전 대표와 윤핵관 측의 갈등은 더 커졌고, 당 윤리위 징계와 윤 대통령의 '내부총질이나 하던 당대표' 문자 메시지 노출을 계기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 됐다.
홍준표(68) 대구시장은 대선 약 한 달 전이었던 지난 2월 10일, 자신의 홈페이지 '청년의꿈'에서 한 지지자가 '아무리 당 대표라도 대선배이자 전 당 대표인 홍 의원보고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 오라 가라 한다. 너무 싸가지 없는 것 아닌가'라고 비판하자 "그렇지 않아요. 예의 발라요"라고 해명했다. 홍 시장이 당시 "토요일(2월 12일) 19시30분에 이 대표가 동성로에 나오랍니다"라고 말한 부분을 지지자가 문제 삼자 설명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대표의 언행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지난 15일 페이스북에 "더 이상 이준석 신드롬은 없다"며 "아직도 1년전 상황으로 착각하고 막말을 쏟아 내면서 떼를 쓰는 모습은 보기에 참 딱하다. 이제 그만 새로운 변화에 적응 하고 보다 성숙되고 내공 있는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썼다.
이 전 대표는 19일 MBN 방송에서 홍 시장이 자제를 촉구한 데 대해 "홍 시장도 과거 당에서 공천을 못 받을 상황에 처하자 많은 말을 하고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고, 제가 복당을 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남의 일이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자기 일이라면 과거에 크게 말씀을 하셨던 분"이라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