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1일 한국 국회에서 화상 연설을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후 유럽연합(EU)을 시작으로 23국에서 화상 연설을 했고, 한국은 24번째 국가가 됐다. 그런데 화상 연설 분위기는 다른 나라와 크게 달랐다. 다른 나라의 국회는 젤렌스키 연설을 들으려는 의원들로 빈 자리를 찾아볼 수 없었는데, 한국은 곳곳이 텅텅 비었다.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있었던 기립박수 역시 없었다.

더불어민주당 박지현, 윤호중 공동비대위원장, 박홍근 원내대표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 권성동 원내대표, 정의당 여영국 대표를 비롯한 여야 의원들이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진행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화상연설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젤렌스키 대통령의 한국 국회 연설은 이날 오후 5시 국회도서관 지하 강당에서 진행됐다. 연설을 성사시킨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광재 외교통일위원장은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 출신 고려인 난민들의 상황을 점검하고 이날 오전 귀국했다. 그는 “전쟁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톨스토이의 말을 인용하며 러시아를 비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47일 간 러시아의 전면적 진군에 맞서고 있는 우크라이나 모든 국민을 대표해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대한민국 국회에 감사드린다”며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데 대해 “이 전쟁을 갑자기 시작한 게 아니라 10년 넘게 준비해 왔다. 10년 이상 막대한 자원을 동원해 준비한 전쟁”이라며 “석유와 가스 수출로 받은 수천억달러의 자금은 무기 생산과 축적에 사용됐고, 러시아는 수많은 미사일을 우크라이나를 향해 쏘아 올렸다”고 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화상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면서 러시아 국민들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지배 하에서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 국민들은 빈곤에 시달리면서, 음식과 옷, 휴가, 교육 등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기본적 인권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 살고 있다”며 “러시아 군인들은 (침공 후) 일반적인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 보고 놀랐다”고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그 증거로 “러시아 군인들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컴퓨터, 전자기계 등 여러 물건을 훔쳐 우편으로 (고향에) 보내고 있다”며 “심지어 러시아 군인이 방탄조끼에서 방탄판을 꺼내 훔친 노트북을 집어넣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독립을 없애고, 우크라이나 민족, 문화, 언어 등을 없애려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가장 먼저 찾아내는 사람은 민족운동가와 우크라이나 역사와 언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이런 사람들부터 학살한다”며 “러시아 지도부에서 내려진 명령”이라고 말했다.

스페인 의원들이 5일(현지 시각) 수도 마드리드 의사당에서 화상 연설에 나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화면)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일제히 박수를 보내고 있다. /AP 연합뉴스

러시아의 침략 야욕은 우크라이나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만 점령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다른 국가도 분명히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모든 나라가 독립을 가질 권리가 있고, 모든 사람들은 전쟁으로 죽지 않을 권리가 있다”며 “우리는 바로 이런 것을 위해 싸우고 있다. 우리와 함께 서서 러시아에 맞서기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리는 20세기에 이런 파괴를 많이 봤다”며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은 1950년대에 전쟁을 한 번 겪었고, 수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겨냈다. 그때는 국제사회가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제사회에 대러 경제제재를 강화할 것을 촉구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수많은 경제 제재가 도입됐지만, 러시아는 아직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며”앞으로 러시아 은행들은 국제 은행과 협력이 완전히 멈춰야 하고, 다른 국가 기업들은 러시아와 협력을 완전히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한국에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인도적 지원과 의료품, 전투식량, 방탄헬멧 등 군수물자 지원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러면서 “러시아는 소련 때부터 강대한 군대를 갖고 있다. 우리가 러시아와 전쟁에서 이기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며 “대한민국이 우크라이나를 도울 수 있다. 한국에 러시아의 전차, 전함, 미사일을 막을 수 있는 군사장비가 있다”고 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일본 국회에서 화상 연설을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화상 연설 후 기립박수를 치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운데)의 모습. /교도 연합뉴스

이어 “우크라이나가 이런 무기를 받게 되면 일반 국민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고, 다른 국가들도 러시아의 공격을 받지 않게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올렉시 레즈니코프 우크라이나 국방부 장관은 서욱 국방부 장관과 통화에서 대공무기체계 등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살상용 무기체계 지원은 어렵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무기 지원을 공개 요청한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젤렌스키 대통령의 연설을 대하는 관심은 다른 나라보다 크게 낮았다. 우리보다 먼저 연설을 한 23개국은 대부분 연설 장소에 의원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빈 자리가 없었으나, 이날 국회도서관 강당은 곳곳이 텅텅 비어 있었다. 참석한 의원들도 더불어민주당 윤호중·박지현 공동비상대책위원장,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각 당 원내대표 등 지도부와 국회 외통위, 국방위 위원들을 중심으로 약 50여명 참석했다.

다른 나라 연설에서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연설을 마치면 의원들이 기립해 박수를 쳤지만, 이날 우리 의원들은 자리에 앉아서 박수를 쳤다. 고려인마을이 지역구에 있는 이용빈(광주광역시 광산갑) 민주당 의원이 이광재 위원장과 폴란드에 있는 우크라이나 난민촌을 둘러보고 온 결과를 보고하고, 고려인 난민 수용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발언을 할 때 의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르르 바깥으로 나가기도 했다.

15일(현지 시각) 캐나다 수도 오타와의 의사당에서 의원들과 초청 인사들이 대형 모니터 화면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화상 연설을 하기 위해 등장하자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17일(현지 시각) 독일 수도 베를린의 의사당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화상을 통해 연설을 마치자 하원 의원들이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달 16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연방 의사당의 '방문자 센터 오디토리엄'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화상 연설을 위해 대형 화면에 등장하자 미 상·하원 의원들이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자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미국의 추가 지원을 요청했다. /AP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