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법이 일부 기업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지난 24일 한 언론사 행사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내년 1월 27일 시행되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법)’에 대한 기업계의 우려감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중대재해법의 핵심은 법령이 정한 안전·보건 조치 의무를 위반해 중대 산업재해나 시민재해에 이르게 한 경우 법인과 사업주, 경영 책임자 등에게 형사 책임을 묻고, 고의 중과실까지 입증되면 민사 손해배상 책임을 통상보다 무겁게 지우는 것이다.
경영계는 경영진에 대한 형사처벌 등 과중한 조치 의무와 법적 책임에 따른 산업 현장 위축을 우려한다. 반면, 노동계는 생명 존중과 시민 안전을 강조하며 맞선다. 아직 제대로된 가이드라인이 없어 일부 규정의 포괄성·불명확성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시각과 상시 근로자 5인 미만 사업장 제외 및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2년 시행 유예에 따른 실효성 저하를 비판하는 시각도 상존한다.
그러나 입법 과정에서도 이러한 우려는 무수히 제기됐었지만, 국회는 단 2주 만에 군사작전 하듯 법안을 통과시키고 부작용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 부작용을 줄이겠다고 책임을 정부로 떠넘겼다.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한 경제계의 법 개정 등을 요구에도 딴 청을 피우고 있다. 내년 5월부터 대한민국을 이끌겠다고 선거전에 나선 대선 후보들도 이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불과 2주만에 졸속, 과잉입법”...논란은 여전
29일 경재계와 정치권에 따르면 이동근 경총 상근부회장은 최근 언론 기고를 통해 “영국의 기업과실치사법은 산재 사망사고에 한해 법인의 벌금형만 도입했는데, 수많은 논의와 분석·평가를 거쳐 법 제정까지 무려 13년이 걸렸다”며 “하지만 우리나라는 법안 심의 2주 만에 국회를 통과했고, 처벌 수준도 가히 세계 최고”라고 지적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일반 기업뿐 아니라 공기업에도 적용되고 관련 부처가 6개나 되는 등 파급력이 크다.
이 법은 지난 1월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때부터 졸속입법이라는 논란이 컸다. 여야 합의로 법을 제정했지만 각 정당과 경제계·노동계 모두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법 적용 전 유예기간 1년 동안 보완·개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여전히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당시 중대재해법은 재석 266석 가운데 164표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제 1야당인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 대부분은 표결에 반대하거나 기권했고, 중대재해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해온 정의당도 기권했다.
표결에 참여한 더불어민주당 의원 161명 가운데서도 1명 반대·4명 기권 등 이탈표가 나왔다. 보수 야당은 지나친 규제라는 점을, 진보 야당은 원안에서 후퇴했다는 점을 문제삼았다.
국민의힘은 4명만 찬성표를 던졌다. 송석준 국민의힘 의원은 표결 전 반대 토론에서 “일자리를 창출해야 할 기업에게 코로나19 사태로 맞은 위기에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둔기로 뒤통수를 치는 형국”이라며 법안 처리를 보류하고, 국회에 중대재해예방특위를 구성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법조인 출신인 권성동 의원도 “과실범에 불과한 산업재해 사범을 고의범죄사범 보다 더 엄히 처벌한다”며 “헌법상 수백 개 하청업체가 있는데, 한 곳에서 사망 안전사고 발생 시 본청 대표이사가 책임자가 처벌받게 되는데, 수천 개의 현장을 어떻게 책임지나. 명백환 과잉입법”이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서조차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삼성전자 출신인 양향자 의원(현재 무소속)은 “‘안전의 전문화’를 통해 산업 생태계 자체를 바꿔보자는 취지였는데 반영이 안 됐다”며 “심사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것도 아쉽다”고 말했다.
◇‘뜨거운 감자’인데 대선 주자들은 뚜렷한 입장 없어
논란이 큰 만큼 중대재해처벌법은 내년 3월 대선 노동 정책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양강’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뚜렷한 입장과 공약을 아직 밝히지 않았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는 노동계 의견을 중시해 중대재해처벌법을 강화하겠다고 언급했으며,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는 중대재해처벌법을 보완하겠다고 발언한 정도다.
다만, 이 후보와 윤 후보의 근본적인 입장에는 차이가 엿보인다.
이 후보는 지난해 12월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산재사망률 1위 오명을 벗어나려면 제대로 된 중대재해법을 만들어야 한다”며 “현재 법으론 기업 불법행위 근절이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고용노동부가 확보하게 된 전담수사권을 지방자치단체와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10월 18일 국회 경기도 국정감사에서 “고용부 근로감독관 수가 2900명 수준인데 이 숫자로는 약 400만 개의 사업장 관리가 불가능하다”며 다시금 지방정부에도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대재해처벌법 관리 감독을 강화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윤 후보는 중대재해법이 ‘과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경선 주자 시절 한 언론 인터뷰에서 “경영진을 직접 사법처리하는 문제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경영주 형사처벌보다 법인에 대한 고액 벌금부과 등의 방식을 제시했다. 또 지난 7월 말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선 “우리나라에만 있는 법 같다”며 중대재해처벌법의 경영주 형사처벌 규정 강화가 과도하다는 입장을 우회적으로 피력했다. 중대재해법을 둘러싼 두 후보의 시각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권에서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양측 다 중대재해법 개정 문제가 선거 이슈로 부각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관측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치 컨설턴트는 “중대재해법 개정 이슈는 자칫 건드렸다가는 이념 논쟁에 휩싸이기 쉬운 데다, 득표에는 도움은 안되고 강력한 반대 여론에 직면할 수 있는 이슈”라면서 “후보들이 각 진영의 입장에서 원론적인 언급만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