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경상수지 흑자가 원화 강세로 이어지던 전통적인 공식이 깨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개인과 기업의 해외 투자가 급증하면서, 환율을 움직이는 힘이 상품 교역에서 자본 유출입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17일 한은이 공개한 '우리나라 대외부문의 구조적 변화가 환율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2015년 이후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와 원·달러 실질환율의 관계를 분석해 이같이 밝혔다. 보고서는 김지현·김민 한은 국제국 국제금융연구팀 과장이 작성했다.
실질 환율이란 물가 수준을 반영해 계산한 상품의 교환 비율을 말한다. 실질환율이 상승했다면 외국 상품 대비 한국 상품이 상대적으로 싸져서 수출 경쟁력이 강화되고, 반대의 경우라면 한국 상품이 상대적으로 비싸져 수출 경쟁력이 약화됐다는 뜻이다.
통상 수출 호조에 따른 경상수지 흑자는 우리나라 상품에 대한 해외 수요 증가를 의미해 원화 가치를 높이는 요인이다. 그러나 2015년 이후에는 경상수지 흑자에도 환율이 오히려 오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가 1%포인트 확대돼도 실질환율은 평균 0.65% 상승했다.
연구진은 이 같은 변화의 원인으로 민간의 해외투자 증가를 꼽았다. 과거에는 경상수지 흑자로 쌓인 자금이 대부분 외환보유액 등 준비자산 형태로 축적됐으나, 2010년대 이후에는 해외 주식·채권 등 민간 증권투자가 빠르게 늘었다. 지난해 말 기준 전체 대외자산 중 민간 증권투자 비중은 44.1%로, 준비자산(14.9%)의 약 3배다.
자산 축적 구조가 바뀌면 환율을 좌우하는 요인도 달라진다. 과거에는 무역을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달러가 환율이 움직였다면, 이제는 자본 이동이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김지현 과장은 "경상수지 흑자로 우리나라 상품의 수출이 늘어 환율을 내리는 현상을 '상품 충격', 국내 거주자의 해외 자산 투자로 인한 자본 유출이 환율을 올리는 현상을 '금융 충격'으로 명명했을 때, 2015년 이후 금융 충격 빈도가 늘었다"고 설명했다.
고령화로 인한 저축 증가도 환율 상승 요인이다. 가계가 번 돈에서 소비 등을 빼고 남은 돈의 비율을 뜻하는 '가계 순저축률'은 2000년대 평균 2.4%에서 최근 6.1%로 상승했다. 저축이 늘면 소비가 줄고, 기업은 남은 상품을 팔기 위해 가격을 낮춘다. 이 과정에 국내 상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빨리 하락해 실질 환율은 상승한다.
연구진에 따르면 저축 수요 증가는 실질환율을 약 12% 끌어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김 과장은 "저축률 상승은 2011년 이후 실질환율의 완만한 추세적 상승에 기여했다"면서 "반면 상품 충격은 2000년대 및 2010년대에는 원화 절상에 기여했으나, 최근에는 그 영향력이 크게 약화했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