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오찬회담에 참석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한국과 미국이 29일 정상회담에서 당초 합의한 2000억달러 규모 대미 투자를 매년 200억달러씩 10년에 걸쳐 투자하는 방식으로 조정하면서 대규모 외화 유출로 인한 외환 위기를 피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한국 경제 규모를 고려할 때 장기적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미 양국이 합의한 200억달러(한화 28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는 한국 정부의 연간 사회간접자본(SOC) 분야 예산 규모(2026년 예산안 기준 27조5000억원)를 상회한다. 이는 국내 인프라 예산과 맞먹는 규모를 매년 미국에 투자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이날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프레스센터에서 진행한 브리핑에서 "대미 금융투자 3500억달러는 현금 투자 2000억달러와 조선업 협력 1500억달러로 구성된다"라면서 "연간 투자 상한을 200억달러로 설정했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이어 "2000억달러의 투자가 한 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연간 200억달러 한도 내에서 사업 진척 정도에 따라 달러를 투자한다"면서 "우리 외환시장이 감내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으며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했다.

김 실장은 200억달러 조달 방안과 관련해선 "우리 외화 자산의 운용 수익을 활용할 생각"이라며 "이자, 배당 등 운용 수익이 적지 않아서 상당히 많이 활용할 수 있을 것 같고, 만약 그중 일부를 기채(채권 발행)하면 정부 보증채 형식으로 할 듯하다"고 설명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29일 경북 경주 APEC 미디어센터에서 한미 정상회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한은 총재 "연간 200억불, 다행"… 10년납 전환으로 이자 부담 400억불 줄여

한미는 이날 한국의 대미 투자 규모를 2000억달러로 유지하되, 방식은 '일시납'에서 '할부' 방식으로 변경했다. 미 측에선 당초 '선납'을 요구했으나, 우리 측에선 대미 투자 규모(3500억달러)가 우리 외환 보유고(4200억달러)의 83%에 달한다며 일시적인 외화 유출로 외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강하게 전달했다.

미 재무부를 중심으로 이 같은 인식에 공감했고, 결국 우리의 요구를 수용해 투자 방식을 일시납에서 10년 할부로 변경했다. 국채 금리 3% 기준으로 2000억달러를 10년간 분할 납입하면서 발생하는 복리 이자 절감 효과만 약 400억달러에 달한다.

또 한 번에 2000억달러가 나갈 경우 외환 불안이 커지지만, 연간 200억달러 규모는 한국 경제가 감당 가능한 규모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이날 기획재정위원회 종합감사에서 대미 현금 투자 연간 상한액을 200억달러로 설정한 데 대해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는 관세 협상 타결 전에도 "연간 150억~200억달러 규모는 해외에서 기채(채권 발행)하지 않는 규모"라며 한국이 부담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 교수는 "오늘 협상 결과는 우리 측에서 최선의 결과로 보인다"라면서 "200억달러 정도라면 투자 개념으로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규모"라고 말했다.

이시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원장도 "힘들었던 협상에서 그나마 최선의 결과를 얻어낸 것으로 보인다"라면서 "다만 규모는 줄였지만 200억달러 규모도 적지 않다. 한국으로선 안 가본 길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한미 확대 오찬회담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 곳곳에 안전장치 뒀지만… 파급 효과 '불확실성' 커

우리 정부는 이번 통상 협상을 합의하는 과정에서 여러 안전장치를 뒀다. 투자위원회와 협의위원회를 만들어 구체적인 투자 프로젝트를 상호 협의해 결정하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김 실장은 "원리금이 보장되는 상업적 합리성이 있는 프로젝트만 추진하도록 MOU 문안에 명시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또 투자금도 임의로 지출하지 않고 사업의 기성 부분, 즉 진척에 따라 지급하도록 한 것도 안전장치 중 하나다. 김 실장은 "사업이 진도가 나가고 실제 투자가 이뤄진 만큼만 돈을 분납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러한 안전장치를 우리 경제에 미칠 파급 영향을 최소화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순 있지만, 한국 경제에 장기적인 부담을 안겼다는 평가는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승헌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200억달러로 줄였지만, 이도 만만치 않은 규모"라면서 "투자금을 외채로 조달한다면 정부 대외채무 증가도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협상 결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강성진 교수 역시 "대미 투자 확대로 인한 국내 산업 공동화가 우려된다"라면서 "우리가 강한 조선과 자동차 제조 산업이 미국으로 대거 이동할 수 있다. 우리 경제 파급 효과가 예상보다 클 수 있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등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 투자금 조달은 어떻게… 한은·KIC 운용 수익 활용 가능성

연간 200억달러 규모 투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도 주목된다. 김 실장은 외화 자산 운용 수익을 활용하겠다고 했다.

정부 안팎에선 한국은행과 KIC의 외화 자산 운용 수익을 주요 재원으로 활용하고, 필요 시 일부는 정부보증채 발행을 통해 조달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외화자금 투자 운용 수익은 한은과 KIC에서 상당 부분 발생한다.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도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외화자금 투자 수익은 얼마나 될까. KIC는 지난해 2065억달러를 운용하면서 운용 자산 수익률이 8.49%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를 토대로 추산하면 KIC의 지난해 운용자산 수익 규모는 175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한은도 외환보유고 4200억달러를 운용하고 있다. 한은은 현재 구체적인 외환보유고 운용 수익률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한은의 외환 운용 수익률을 5%로 가정하면 210억달러가 된다. 실제로 한은은 지난해 연차 보고서에서 유가증권 이자와 유가증권 매매익, 외환 매매익 등 수입익을 21조759억원으로 기록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은이 보유한 유가증권 중 94%는 외화증권이다.

조용구 신영증권 연구원은 "대미 투자금 200억달러 중 150억달러는 외화 자산 운용 수익으로 충당하고, 50억달러는 외화 채권을 발행하는 시나리오가 가능해 보인다"라면서 "이번 합의로 원·달러 환율이 급등할 가능성은 낮아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대미 투자가 안정기에 접어들어 수익이 발생할 경우, 해당 수익을 다시 대미 투자금으로 돌리는 방안도 거론된다. 한 금융기관 관계자는 "대미 투자에서 발생한 수익금을 재투자하는 방안도 가능할 것"이라면서 "장기적으로는 투자 수익금이 투자원금을 상당 부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