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재해·재난 등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쓰는 '예비비'가 사실상 바닥난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복구,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등에 예비비를 쓰고 나면, 연말까지 2개월여간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대응할 재정 여력이 없는 상황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24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정부가 올해 편성한 예비비는 대부분 용처가 정해진 상태다. 올해 예비비는 당초 본예산에서 2조4000억원 규모로 편성됐다. 예비비는 지난해 국회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내건 부대 조건에 따라 고교 무상교육과 5세 무상교육에 1조2000억원가량이 우선 투입됐다.

그러다 올해 3월 22일 경북 지역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산불이 발생했다. 열흘간 이어진 산불로 1조818억원의 피해가 발생했고, 복구비는 역대 최대인 1조8809억원으로 산정됐다.

여기에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으로 6월 3일 21대 조기 대선을 치르면서 예비비를 추가로 써야 했다. 지난해 확정된 예산안에는 선거 관련 비용이 반영되지 않았었다.

정부는 4월 8일 국무회의를 열고 투표소 운영, 개표 관리, 선거 보조금, 선거 비용 보전 등 선거 관련 예산 3957억원을 예비비에서 빼서 집행했다.

산불 피해 지원에 쓸 예비비가 부족해지자, 정부는 지난 5월 1차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통해 재해·재난 대응 재원을 3조2000억원 새로 마련했다. 추가 예비비(1조4000억원) 외에도 직접적인 피해 복구 지원 예산(1조4000억원) 등을 추경안에 담으면서, 상당 규모의 예비비를 조달했다는 것이 당시 정부 측 설명이었다. 정부 관계자는 "7월 기준 1차 추경으로 마련된 1조4000억원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3월23일 어둠이 짙게 깔린 경북 의성군 의성읍 업리 동사곡지 뒤 야산에 산불이 확산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8월부터 예비비 지출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해수부 부산 이전'을 추진하기 위해, 정부는 8월 18일 국무회의에서 867억원의 예비비를 투입하기로 했다.

9월 16일에는 출생아 증가로 부족해진 아동수당·부모 급여 예산 3079억7700만원, 첫만남이용권(출생 아동에게 200만원 이상 지급하는 바우처) 예산 422억2000만원, 고준위 방폐물 관리위원회 출범 운영 경비 19억9500만원 등을 예비비에서 충당했다.

이달 들어서도 예비비 지출이 이어졌다. 정부는 지난 14일 해외 우수 인재 국내 유치 홍보에 51억2000만원을 예비비로 배정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비자 수수료 인상 조치를 계기로, 해외 우수 연구 인력을 국내로 끌어들이는 데 필요한 홍보 작업에 예비비를 지출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 21일에는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장애가 발생한 행정 시스템 복구비로 1521억원을 예비비에서 배정했다. 이 외에도 상당 규모의 예비비가 국가정보원에 투입돼 소진된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의 예비비 집행 내역은 국가 안보상 '2급 기밀'로 분류돼 공개되지 않는다.

정부 관계자는 "지금까지 발생한 수요만으로 올해 예비비는 모두 소진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연말까지 예기치 못한 재해·재난 등이 발생하면 대응 재원이 부족할 것으로 우려되는 이유다. 다만 정부 관계자는 "폭우나 산불 등 역대 재난을 보면, 9~10월 이후로는 사고가 잘 발생하지 않는 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