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보조금 정책을 도입했을 때만해도 '직접 재정 지원'에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던 정부가 자금 지원을 포함한 패키지 지원 정책을 내놓은 것은 일본이 최근 발표한 반도체 지원 정책의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 나온다.
27일 정부 관계부처에 따르면 일본은 지난 22일 반도체 산업에 10조엔(한화 91조원) 규모를 지원하는 종합경제대책을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과 전력 반도체 양산 투자에 6조엔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민간대출에 대한 출자·보증 등 4조엔의 금융지원을 약속했다.
특히, 자국 반도체파운드리 기업인 '라피더스'가 2027년부터 반도체를 양산할 수 있도록 추가 출자 지원 가능성도 열어뒀다. 라피더스는 일본의 8개 기업이 반도체 산업 부흥을 위해 공동으로 설립한 회사다. 라피더스는 최첨단 2나노 반도체 양산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일본의 반도체 르네상스를 노리겠다는 것이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1980년대만 해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경쟁력이 있었지만, 미일 반도체 무역협정 체결을 계기로 도태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빈자리는 반도체 산업이 급성장한 한국과 대만이 채웠다.
최근 한국 반도체 산업이 처한 위기 상황은 당시 일본의 쇠퇴 과정과 유사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이 경쟁력을 갖고 있는 메모리반도체는 중국 기업이 염가 공세에 나서며 글로벌 시장에서 가격이 내려가고 있다. 차세대 반도체로 각광받는 고대역폭메모리(HBM) 분야에서는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시스템 반도체와 AI(인공지능) 반도체 분야에선 아직 이렇다할 성과를 못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주요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은 더욱 가열되고 있다. 앞서 미국은 지난 2022년 '반도체법(Chips and Science Act)'을 제정해 약 520억달러(한화 약 69조원)를 투입하는 대규모 지원책을 발표했다. 이 법은 반도체 제조시설의 미국 내 건설과 첨단 기술 개발을 위한 보조금, 세액 공제를 포함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과 양자컴퓨팅 등 차세대 기술 관련 반도체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국 정부는 2020년 발표한 '신형 인프라 건설 계획'과 '반도체 굴기'를 통해 2030년까지 자국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중국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 반도체 펀드'로 불리는 대규모 투자 기금을 통해 반도체 기업에 재정을 지원하고 있다.
유럽연합(EU)도 'EU 칩스법(Chips Act)'을 제정하고, 2030년까지 전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내놨다. 이를 위해 약 430억유로(한화 약 60조원) 규모의 지원금을 투입해, 첨단 반도체 생산 시설 확충을 추진 중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전쟁(칩워)이 더욱 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대만과의 경쟁 국면에서 일본까지 가세할 경우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밀릴 수 있다는 위기감까지 나오고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정부의 반도체 지원 정책이 세제와 인프라 구축 지원에 방점을 뒀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됐다"며 "이런 상황에 일본이 100조원 규모의 반도체 산업 지원 방안을 들고 나오면서 우려가 커졌다. 일본의 보조금 지원이 정부의 노선 변화의 트리거가 된 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