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국채지수(WGBI) 편입을 위해 정부가 지난 6월 야심차게 문을 열었던 유로클리어 국채통합계좌가 기대 이하의 거래 실적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인 투자기관이 유로클리어 국채통합계좌를 통해 국내 투자기관과 거래한 건수가 두 달간 30건에 못미쳤다. 시장에서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도록 돕는 적격외국금융회사(QFI)가 부족해 유로클리어를 사용하기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제증권예탁결제기관(ICSD) 중 하나인 유로클리어는 투자자들이 세계 각국의 증권에 투자할 때 해당 국가에 계좌를 보유하지 않고도 거래할 수 있도록 통합계좌(Omnibus Account)를 제공한다. 전세계 40개국 시장에 대한 투자를 지원하며 2022년 기준 고객자산 17조5000억 유로(한화 2경5894조원, 원·유로 환율 1479.66원 기준)를 보관하고 있다.

◇ 두 달간 29건·489억원… 이틀에 한 번씩만 거래

2일 조선비즈 취재에 따르면 유로클리어를 통한 인수·인도·매수·매도 거래는 지난 6월 27일 첫 개통 이후 약 두달 뒤인 지난달 20일까지 총 29건, 거래금액은 488억9180만원이었다. 이틀에 한 번씩만 거래가 이뤄진 셈이다. 인수와 인도는 투자자들이 국채를 서로 주고받은 것이며, 매수·매도는 국내 브로커를 통해 국채를 사고 판 것을 의미한다.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전광판에 코스닥 지수와 원·달러 환율 종가가 표시되고 있다. /뉴스1

거래금액도 적다. 단순 평균하면 건당 16억8592만원씩 거래된 것인데, 통상 국채 거래가 100억원씩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상적인 거래금액의 5분의1 수준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사 채권딜러는 “외국인들은 한 번 거래하면 적게는 100억, 많게는 몇천억씩 거래한다”면서 “거래금액이 10억원대에 불과하다는 것은 유의미한 거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2022년 유로클리어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면서 국채통합계좌 구축을 추진해왔다. WGBI 평가항목 중 하나인 ‘시장접근성’을 개선해 지수에 편입되기 위해서다. 한국은 글로벌 예탁기관 이용 편의성 등 항목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레벨1(일부 불편이 있는 경우)에 머무르고 있다.

기존에는 외국인이 국채 등에 투자하려면 국내 보관기관을 선임하고, 본인 명의 외화·원화 계좌를 개설해야하는 등 복잡한 투자 절차가 필요했다. 이는 외국인에게 국채 투자 문턱을 높이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국채통합계좌를 보유하면 국내에 따로 계좌를 개설할 필요 없이 ICSD에 개설한 계좌로 거래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국채통합계좌를 도입하면 외국인의 역내 거래가 늘어나 시장접근성이 개선되는 것은 물론 외국인 투자자금이 국내로 유입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시장에서는 1400원에 육박하는 등 불안정했던 원·달러 환율을 낮출 수 있다는 기대도 나왔다. 이에 정부도 국채통합계좌를 통한 투자에 비과세를 도입하는 등 다양한 혜택을 줬다

그러나 총 거래건수가 30건이 채 안되면서 효과는 생각 만큼 크지 않은 상황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역내 거래 실적이 적은 것은 개통한 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은 데다 여름휴가철이 겹쳤기 때문”이라면서 “역외에서 이뤄지는 채권 매수·매도나 채권을 담보로 하는 레포(Repo·환매조건부 채권) 거래는 3000건 이상 이뤄졌다”고 했다. 국내 시장접근성은 제자리이지만, 역외 유동성은 개선돼 시장 참가자들의 거래비용은 줄었다는 의미다.

◇ 시스템엔 문제 없지만… “QFI 늘려 비과세 적용 늘려야”

전문가들은 유로클리어 거래가 원활하지 못한 이유로 적격외국금융회사(QFI)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QFI란 비거주자나 외국법인이 국채 및 통화안정증권을 취득·보유·양도할 때 발생하는 이자·양도소득에 대한 비과세 업무를 처리하도록 국세청장이 승인한 외국 금융회사다.

유로클리어를 활용하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비과세 적용을 받으려면 관련 서류를 QFI에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씨티은행 등 일부 글로벌 은행만 QFI로 등록돼있어 외국인들이 비과세 혜택을 받기가 쉽지 않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6월 28일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 호텔에서 열린 '국채통합계좌 시스템 오픈 기념식'에서 참석자들과 기념 세리머니 후 손뼉치고 있다. /뉴스1

기존 투자자들이 유로클리어를 사용할만한 유인이 적다는 비판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채권을 대량 매수·매도하는 외국인 투자자들은 수탁은행과 중개기관을 통해 채권 거래나 비과세 처리 등을 무리없이 진행하고 있다. 이런 투자기관들이 유로클리어로 이동할 경우 별도의 수수료를 또 내야하므로 추가적인 혜택이 없다면 굳이 유로클리어에 가입할 이유가 없다.

금리에 대한 방향성이 뚜렷하지 않아 국내 채권의 투자 매력이 낮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채권시장 관계자는 “외국인들이 국채를 투자하려고 한다면 WGBI에 편입되거나 아니면 금리에 대한 방향성이 뚜렷하게 잡혀야하는데, 아직 둘 다 미지수”라면서 “시장의 상황과 제도적인 모호성이 겹쳐지면서 외국인들이 머뭇거리는 상황으로 보인다. 테스트 거래 정도만 이뤄지지 않았을까 싶다”고 했다.

물론 유로클리어를 통한 거래량이 적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강승원 NH투자증권 채권전략팀장은 “유로클리어는 지금 당장 범용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WGBI 편입 후 외국인 투자가 늘어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개통된 것”이라면서 “유로클리어를 통한 거래가 제대로 이뤄진다는 것을 확인한 게 중요하지 거래량이 적다고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아직까지는 국채통합계좌가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지 QFI가 늘어나면 투자가 자연스럽게 증가할 것”이라면서 “시스템이나 제도 자체에는 문제가 없어 투자자들이 자연적으로 유로클리어로 옮겨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