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연 3.5%로 동결했다. 미국 경제가 견조한 상승세를 보이면서 6월로 예상되던 연준(Fed·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인하 가능성이 작아진 데다, 유가·환율 불안으로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3% 안팎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은이 이날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2.1%에서 2.5%로 상향 조정하면서 내수 부진을 막기 위해 금리를 내릴 명분도 약해졌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이하 금통위)는 23일 열린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연 3.5%로 유지하기로 했다. 지난해 2·4·5·7·8·10·11월과 올해 1·2·4월에 이어 이번까지 11번 연속 금리를 묶어둔 것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3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금통위는 의결문을 통해 “물가상승률이 둔화 흐름을 이어가고 있지만 성장세 개선, 환율의 변동성 확대 등으로 물가의 상방 리스크(위험)가 커진 데다 지정학적 리스크도 지속되고 있다”면서 “현재의 긴축 기조를 유지하면서 대내외 정책 여건을 점검해 나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밝혔다.

이날 동결 결정으로 기준금리는 1년 4개월째 유지됐다. 한은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6%대로 치솟은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을 낮추기 위해 2021년 8월부터 작년 1월까지 금리를 연 0.5%에서 3.5%까지 올렸다. 그러나 경기 부진이 예상되자 작년 2월부터 금리 인상을 멈췄다.

금통위를 앞두고 시장에서는 기준금리 동결에 무게가 실렸다. 금융투자협회가 지난 10일부터 16일까지 채권 보유·운용 관련 종사자 100명(64개 기관)을 설문한 결과, 응답자 98%가 한은이 이번 금통위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할 것이라고 답했다. 직전 같은 조사 결과(98%)와 같은 수준이다.

동결 전망이 우세했던 가장 큰 이유는 미국 연준의 금리 인하 기대감 위축이다. 미국 노동부가 최근 발표한 4월 CPI는 전년 동월 대비 3.4%올랐다. 전월(3.5%)보다는 상승률이 둔화했지만, 여전히 연준 목표치인 2%를 웃돈다. 시장에서는 연준이 6월에도 기준금리를 현행 5.25~5.5%로 동결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은도 현재 2%포인트(p)인 한·미 금리차를 유지하기 위해 금리를 동결할 가능성이 높다.

여전히 높은 물가 수준도 한은이 금리 동결을 망설이는 배경으로 꼽힌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달 CPI는 전년 동월 대비 2.9% 올랐다. 3개월 만에 2%대로 낮아졌지만 여전히 물가안정목표인 2%를 웃돌고 있다.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면서 전체 물가 상승을 견인했다. 최근에는 한국의 1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시장 예상의 두 배인 1.3% 집계되면서 당장 금리를 낮출 필요성도 작아졌다.

불안정한 중동 정세도 우려스럽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갈등은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이란의 권력 서열 2위인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이 헬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국제유가가 오르면서 소비자물가지수의 선행지표인 수입물가가 4개월째 상승했다.

그래픽=손민균

이창용 한은 총재도 이런 점을 고민하고 있다. 그는 이달 초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 참석차 방문한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한국 기자단과 만나 “4월 금통위 때와 비교하면 통화정책의 전제로 삼을 수 있는 기준이 모두 바뀌었다”면서 “5월 회의까지 2주간 원점에서 재검토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한은은 이날 발표한 ‘수정 경제전망’을 통해 올해 우리나라 실질 GDP 성장률 전망치를 지난 2월에 발표한 2.1%에서 2.5%로 높였다. 1분기 GDP가 예상을 웃돈 성장세를 보이자 상향 조정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CPI 상승률은 직전 전망치와 같은 2.6%로 예상했다. 내년 GDP와 CPI 상승률은 모두 2.1%로 예상했다. GDP는 종전 전망보다 0.2%포인트(p) 낮췄고, CPI는 직전 전망치를 유지했다.

한은은 올해 전망치를 지난 2022년 11월에 2.3%로 제시한 뒤 작년 2월(2.4%)과 5월(2.3%), 8월(2.2%), 11월(2.1%)에 수정했다. 이번에 공개된 한은 전망치 2.5%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한 2.3%보다 높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제시한 2.6%보다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