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CBDC(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 발행 준비에 한창인 가운데 민간에서도 디지털화폐 유통 플랫폼 구축에 서두르고 있다. 이미 수 년 전에 사업모델을 구축한 은행권에 이어 최근에는 조폐공사까지 CBDC 사업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CBDC는 디지털 형태의 화폐를 의미한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동전(주화)이나 지폐(은행권)가 아니라 새로운 단위의 ‘사이버 머니’다. 한은이 CBDC를 발행해 은행이나 민간에 공급하면, 경제주체들이 이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유통된다. 중앙은행이 발행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등 탈중앙화 방식의 코인과 구분된다.

해외에서는 바하마와 자메이카, 나이지리아 등 국가에서 신용 취약계층이나 외국인을 위한 결제수단으로 CBDC를 도입했다. CBDC는 카드사나 결제대행사(PG)를 거치지 않고도 결제가 가능해 결제수수료 부담이 적고, 시중은행에 계좌를 개설하지 않아도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조폐公, ICT 부문 사업다각화 박차… “디지털화폐 안정성 관리”

한국조폐공사는 지난달 27일 마포구 독막로 오롯디윰관에서 ‘CBDC 생태계에서 한국조폐공사의 역할’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성창훈 조폐공사 사장을 비롯해 한국은행 발권국장 출신인 하나카드 이정욱 감사, 김의석 카이스트 교수, 채상미 이화여대 교수 등 관련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한국은행이 개발 중인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 가상 이미지. /조선DB

조폐공사는 2000년대들어 실물 화폐나 신분증이 디지털 형태의 수단으로 변화할 것으로 보고 정보통신기술(ICT) 부문을 키워왔다. 지난 2019년 블록체인 기반 지역상품권 ‘착(Chak)’을 개발해 지급결제 기능을 디지털로 전환했다. 2021년부터는 사내 ICT 사업 부문을 개편하고 블록체인 기반의 보안·정품인증 기술을 상품화하는 방안을 고민해오고 있다.

작년 하반기에는 CBDC 도입에 대한 사전 준비 작업 중 하나로 CBDC와 대체불가능한 토큰(NFT)을 담을 수 있는 통합전자지갑을 개발했다. 한은에서 CBDC 도입을 최종 결정하면 디지털화폐의 안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사업에 나선 것이다. 향후 통합전자지갑은 공공영역의 NFT와 디지털위임장 등 디지털플랫폼 정부의 각종 혁신서비스와도 연계될 전망이다.

이날 세미나에서도 조폐공사가 보유한 기술을 토대로 CBDC 사업에 진출할 수 있는 방법이 논의됐다. 발제자로 나선 김 교수는 “현재 조폐공사가 지역사랑상품권 플랫폼 착을 통해 지자체 정책수당을 지급・운영하는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만큼, 향후 CBDC기반으로 발행될 다양한 공공 바우처에 대한 관리기관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이정욱 감사는 “조폐공사가 카드 신분증 및 보안인쇄 제조기술력을 바탕으로 네트워크가 제공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는 카드 형태의 매체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면서 “국민편익을 고려한 CBDC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한국은행과 긴밀히 협력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 신한·우리·농협 등 시중은행도 ‘준비완료’… CBDC 플랫폼 구축 속도

그간 민간에서는 시중은행과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을 중심으로 CBDC 사업 준비가 진행돼왔다. 신한은행과 우리은행, NH농협은행은 LG CNS가 2018년 출시한 블록체인인 ‘모나체인’을, 하나은행은 ‘블록체인 인터넷’으로 불리는 ‘코스모스’를 기반으로 한 플랫폼을 구축했다. KB국민은행은 지난 2021년 한국은행과 CBDC 모의실험을 진행한 카카오 계열사 그라운드X의 블록체인 플랫폼 ‘클레이튼’을 활용해 ‘멀티에셋 디지털지갑’을 개발했다.

CBDC 네트워크 구성도. 한국은행이 CBDC를 시중은행에 지급하면, 은행은 이를 담보로 예금토큰을 발행한다. 고객은 예금토큰을 구입해 결제 등에 활용한다./한국은행 제공

시중은행은 예금을 기반으로 발행하는 ‘예금토큰’의 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여왔다. 예금토큰은 현재 한은이 구상하고 있는 기관용 CBDC 사업이 자리잡는 데 필요한 결제수단이다. CBDC를 기반으로 발행되며, 고객은 예금토큰을 구입해 전자상거래에 활용한다. 예금토큰이 다른 사용자에게 이전되면 은행들은 CBDC를 주고받아 최종 청산한다.

한편 한은은 올 하반기 일반인 10만명을 대상으로 한 CBDC 활용성 테스트를 준비하는 등 도입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 이 테스트에서 은행은 디지털바우처 기능이 들어있는 예금토큰을 발행하고, 참여자들은 이를 이용해 물품을 구매할 수 있다. 테스트를 통해 향후 CBDC 유통 과정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사전에 점검할 수 있을 전망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올해 초 신년사를 통해 “CBDC 테스트로 축적된 경험은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참고할 수 있는 선례가 될 것”이라면서 “디지털 강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일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