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중 유동성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은 유동성이 줄어드는 가운데 한국만 증가하는 모습이다. 우리나라 경제 규모와 비교해도 유동성 규모가 큰 편이라 일각에서는 늘어난 유동성이 물가를 자극할 우려가 제기된다.

◇ 한국 M2 지수, 2022년 11월부터 OECD 평균 웃돌아

25일 OECD에 따르면 작년 7월 한국의 광의통화(M2) 지수는 173.4로, OECD 회원국 평균인 169.2보다 4.2 높았다. 지난 2022년 11월 171.2로 OECD 전체 평균(171.0)을 넘어선 뒤 9개월째 같은 흐름이 지속됐다. OECD는 2015년 통화량을 100으로 놓고 각국의 광의통화지수를 산출한다. OECD가 집계한 한국의 M2지수는 작년 7월이 가장 최근 수치다.

지난 14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에서 직원이 5만원권을 정리하고 있다. /뉴스1

광의통화는 협의통화(M1, 요구불예금 합계)에 만기 2년 미만 예적금, 환매조건부채권(RP), 단기금융펀드(MMF) 등을 포함해 통화량을 집계한 것이다. 시중 유동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로 활용된다. 한국의 광의통화지수가 OECD 회원국 평균보다 높다는 것은 2015년 이후 한국의 유동성 증가 속도가 OECD 평균보다 빠르다는 뜻이다.

한국은 2015년 초까지만 해도 OECD 평균보다 광의통화지수가 낮았다. 그러나 2015년 5월부터 평균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이 기간 유동성이 늘어난 것은 낮아진 기준금리 영향이 컸다. 한국은행은 2015년 기준금리를 사상 처음으로 연 1%대로 낮췄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직후인 2020년엔 0.5%까지 내렸다. 돈을 빌리는 비용이 저렴해지자 시중에 유동성이 대거 풀린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후 정부가 대출 규제를 강화하고, 한국은행도 금리를 높여 유동성을 조이자 한국의 광의통화지수는 다시 OECD 평균보다 낮아졌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 중앙은행이 코로나19 후 침체된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양적완화를 실시하면서 OECD 전체 유동성을 끌어올린 것도 영향을 줬다. 이런 흐름은 2020년 5월부터 지속됐다. 하지만 2년 6개월 만인 2022년 11월 다시 역전됐다.

최근 한국의 유동성 증가는 미국과 영국, 유로지역 등 주요국에서 유동성이 줄어드는 가운데 나타난 현상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미국의 광의통화지수는 2022년 7월 180.2로 정점을 찍은 후 꾸준히 하락해 작년 7월에는 173.2를 기록했다. 영국과 유로지역은 2022년 10월(155.3)과 9월(152.4) 나란히 최고치를 기록한 후 작년 7월 각각 149.6, 150.8로 낮아졌다. 반면 한국의 광의통화지수는 2022년 7월 169.02에서 1년 만에 173.35로 올랐다.

◇ 성장률 둔화하는데 유동성 올라… 물가 자극 우려

만약 최근의 유동성 증가세가 한국경제가 성장하는 가운데 나타난 것이라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어빙 피셔가 만든 화폐 교환방정식(MV=PY, M은 통화량, V는 화폐유통속도, P는 물가, Y는 실질 국내총생산(GDP))에 따르면 경제가 성장하면 시중 유동성도 자연스레 증가하기 때문이다.

지난 16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사과와 배를 고르고 있다. /뉴스1

그러나 한국의 성장률은 꾸준히 둔화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실질 GDP 성장률은 2020년 -0.7%를 기록했다. 이듬해 4.3%로 올랐지만 2022년엔 다시 2.6%로 떨어졌고, 작년엔 잠재성장률(2%)을 밑도는 1.4%를 기록했다. 화폐 교환방정식에 따르면 공급이 늘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유동성이 증가한다면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

한은은 아직까지는 유동성 증가세를 우려할 수준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양적완화를 실시하지 않아 전체 통화량 규모가 적다는 점에서다. 한은은 작년 12월 28일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증가율이 아닌 총규모를 기준으로 미국과 한국의 통화량을 비교해 보면, 코로나 이전에 비해 미국의 통화량은 여전히 우리나라보다 높은 수준”이라고 했다.

그러나 경제 규모와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유동성 규모는 매우 큰 수준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2년 말 우리나라 GDP 대비 광의통화 비율은 173.85%로, 코로나19 전인 2018년(142.26%) 대비 30%포인트(p) 이상 증가했다. 주요국 중에서는 홍콩과 일본, 중국 다음으로 높았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아직까지는 유동성이 풀려도 예금이나 부동산 등 자산으로 유입돼 물가를 끌어올리지 않는 상황”이라면서 “증가율 자체도 장기 평균과 비교할 때 아주 낮다”고 했다. 그는 “다만 소비가 살아나면서 유동성이 실물시장으로 유입된다면 물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