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2일 “상반기 내 금리 인하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물가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지만 언제 다시 튈지 모르는 ‘울퉁불퉁’한 상태인 만큼, 아직 금리 정책 방향을 명확히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생각보다 매우 부진할 것으로 예상되는 우리 내수 상황이 현재 물가 압력 약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금융통화위원회 위원들 사이에선 이런 내수 악화가 더욱 심화하면, 이에 대응하기 위해 ‘조기 금리 인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소수의견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이날 금통위 직후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전 세계가 물가 안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평탄한 선형의 형태로 내려오지 않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등 울퉁불퉁한 길을 내려오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2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총재는 그러면서 “한은의 예상대로 물가가 안정화하는지를 확인한 뒤 금리 움직임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라며 “5월에 발표할 경제 전망 변화가 굉장히 중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이날 한은 금통위는 만장일치로 기준금리를 연 3.5%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2월부터 1년째, 9번 연속 금리를 묶어둔 결정이었다.

그는 3개월 후 금리 수준에 대해 “(총재를 제외한) 금통위원 6명 중 5명이 연 3.5%를 유지하는 게 적절하다는 견해를 밝혔다”면서 “나머지 1명은 지금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인하할 가능성을 열어놔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고 전했다.

지난달 금통위 회의에서 모든 금통위원이 ‘현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고 본 것에서 나아가, 인하 필요성이 희미하게나마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는 ‘내수 부진’이 생각보다 심각해서다. 이 총재는 “소비가 당초 전망보다 부진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물가 압력이 약화한 데다가, 내수 부진 자체에 대해 사전 대응을 하기 위해 조기 금리 인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한은이 이번에 함께 발표한 수정 경제 전망에서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변함이 없었지만, 내수·수출 등 세부 분야별로는 조정이 있었다. 이 총재는 “올해 민간 소비 전망치가 당초 1.9%에서 1.6%로 하향 조정되는 등 내수 부진이 올해 전체 성장률을 0.1%포인트(p)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면서 “하지만 미국의 경제 성장과 반도체 수출 개선이 0.1%p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해 상쇄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물가가 당초 우리 생각보다 안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 바람직하기도 하지만, 그 이유 중 하나는 내수가 생각보다 나빠졌기 때문”이라면서 “경기 면에서는 나쁜 뉴스”라고 덧붙였다. 한은은 이날 올해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 전망을 2.1%로 유지했다. 물가 성장률도 2.6%로 예상하며 종전 시각을 유지했으나, 근원물가 상승률은 2.2%로 하향 조정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2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통화정책방향을 설명하고 있다. /뉴스1

한편 이 총재는 최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구조조정의 불확실성이 경기에 하방 위험으로 작용한다면서도, 금리로 대응할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태영건설 사태가 잘 진정된 것처럼 (문제 되는) 부동산 PF가 질서 있게 정리되는 모습을 보인다”며 “PF 문제는 미시적 정책을 통해 금융시장 안정을 도모할 일”이라고 했다. 총선 이후 건설업계가 줄도산할 것이라는 ‘4월 위기설’이 제기되는 것과 관련해선 “총선 전후 상황이 크게 바뀔 거라는 근거가 뭔지 오히려 반문하고 싶다”고 답했다.

다만 이 총재는 “금리 정책을 잘못 구사해서 부동산 가격을 인위적으로 올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 않는 것은 (한은 입장에서도) 중요한 일”이라며 “금리를 내릴 시점이 됐을 때 부동산 시장을 자극하지 않도록 정부와 함께 거시 안정 정책을 펴야 한다는 것이 지난 몇 년간 배운 교훈”이라고 했다.

국내 대출금리가 미국 정책 금리에 따라 변동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과 관련해선 “한은 통화정책의 독립성이 사라졌다기보단, 해외 투자 등이 많이 늘어나면서 우리 금융시장의 선진국과의 연계 움직임이 과거보다 더 커진 것”이라며 “오히려 이게 정상화된 현상이라고 보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3~5년물 장기 금리의 경우, 50% 정도는 정책금리에 따라 움직이고 50%는 국제 금융시장을 따라가는 것 같다”며 “앞으로 통화정책 결정 과정에서 고려할 요소가 많아졌다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피벗’(pivot·통화정책 전환)이 이뤄지면, 앞으로 각국이 차별화한 통화 정책을 구사하기가 상대적으로 더 쉬워질 것이라고도 했다. 이 총재는 “작년·재작년엔 미국의 금리 인상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국제유가도 빨리 올라가서, 각국이 미 금리를 따라가야만 하는 입장이었다”면서도 “미 금리를 낮추는 분위기가 잡히면 각국이 자기의 인플레이션률에 따라 차별화된 정책을 쓸 수 있는 유인이 더 커진다. 그때 우리도 국내 경기나 외환 상황을 종합해서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