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올해 상반기 내 금리 인하가 쉽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둔화 흐름을 이어가고 있지만 물가안정 목표인 2%에 도달하지 않은 데다 가계부채 증가세도 꺾이지 않았다는 점을 판단 근거로 들었다. 다만 금통위에선 3개월 후 인하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소수 의견도 나왔다.

한은은 긴축기조가 지속될 것으로 예고했지만, 시장에서는 인하 가능성에 한 발 더 다가갔다는 메시지에 주목했다. 이날 발표된 수정 경제전망에서 한은이 내수 성장률과 근원물가 상승률 전망을 이전보다 낮춘 것도 금리를 내릴 여건이 조성됐다는 판단에 힘을 실었다.

◇ ‘3개월 후 인하’ 의견 등장… “소비·근원물가 상승률 낮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이하 금통위)는 22일 열린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연 3.5%로 동결하기로 했다. 지난해 2·4·5·7·8·10·11월과 올해 1월에 이어 이번까지 9번 연속 금리를 묶어둔 것이다. 이번 결정은 만장일치로 이뤄졌다.

그래픽=손민균

금통위는 의결문을 통해 “물가상승률이 둔화 추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전망의 불확실성이 큰 상황인 데다 주요국 통화정책과 환율 변동성, 지정학적 리스크 등 대내외 정책 여건의 변화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면서 “현재의 긴축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했다.

그러나 향후 3개월 뒤 금리 수준을 묻는 말에는 금통위원의 의견이 엇갈렸다. 총재를 제외한 6인 중 5명은 현재 수준이 적정하다고 주장했지만, 나머지 한 명은 낮은 수준으로 인하할 가능성을 열어놔야 한다고 했다. 위원이 ‘3개월 후 금리 인하’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작년 10월 이후 처음이다.

금통위원의 판단이 엇갈린 배경으로는 예상보다 증가세가 더딘 민간소비가 지목된다. 한은은 이날 발표한 수정 경제전망에서 올해 민간소비 성장률을 1.6%로 예상했다. 작년 11월 발표한 직전 경제전망에선 1.9%로 예상했는데, 3개월 만에 0.3%포인트(p) 낮춘 것이다. 다만 수출 증가율을 직전 전망(3.3%)보다 높은 4.5%로 예상하면서 전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이전 전망(2.1%)을 유지했다.

한은이 물가의 기조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지표인 근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2.3%에서 2.2%로 낮춘 것도 금리 인하 필요성을 높였다. 근원물가는 에너지와 식품 등 변동성이 큰 품목을 제외한 물가를 말한다. 근원물가 상승률이 낮아졌다는 것은 예상보다 소비 회복세가 더디다는 뜻이다. 다만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작년 11월 전망과 같은 2.6%로 유지했다.

한은은 “물가 상승률은 더딘 회복세 등으로 근원물가를 중심으로 완만한 둔화 추세를 이어가겠으나, 농산물 가격 상승 등으로 둔화 흐름이 당분간 주춤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물가 전망경로 상에는 지정학적 리스크, 국내외 경기 흐름, 누적된 비용압력의 영향 등과 관련한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이라고 했다.

◇ “비둘기파적이었다”… 원화·채권가격 모두 강세

시장에선 3개월 후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이 고개를 든 것에 더욱 주목한 모습이다. 강승원 NH투자증권 연구원은 “2월 금통위는 의외로 도비시(비둘기파적·완화 정책 추구)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창용 총재가 ‘상반기 인하는 없을 것’이라는 사견을 밝혔지만, 하반기 인하 질문했을 때 어쨌든 부정하지 않았다”며 “금통위 전반적으로는 ‘하반기엔 (타이밍을) 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으로 보이고, 소수의견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한은도 미 연준이 (정책 전환) 신호만 주면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시사한 셈”이라고 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2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뉴스1

이에 반응해 국고채 시장 역시 일제히 강세(금리 하락)를 띠었다. 한은의 금리 인하 가능성을 열어둔 발언으로 매수세가 크게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이날 서울 채권시장에서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전 거래일보다 6bp(1bp=0.01%p) 떨어진 연 3.342%에 거래를 마쳤다. 2·5·10년물 금리 모두 5bp대 하락세를 보여 각각 연 3.419%, 연 3.391%, 연 3.424%로 마감했고, 20·30·50년물도 모두 3bp 이상씩 내렸다.

반면 원화는 긴축 기조가 유지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모습이다. 서울외국환중개에 따르면 이날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6원 내린 1328.70원에 마감했다. 금리 인하 기대감이 반영된 채권과 달리 원화는 현재 금리 수준이 지속될 것으로 본 것이다. 전날 발표된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호실적에 맞물려 반도체주를 중심으로 국내 주식시장이 강세를 보인 것도 영향을 줬다.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에 금리 인하 기대감이 고조되긴 했으나, 실제 단행 시기가 7·8월쯤이 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에는 변함이 없다는 분위기다. 김명실 하이투자증권 연구위원은 “향후 5월 금통위에서 금리 인하 첫 소수의견이 등장할 것이고, 이때 물가 전망치 하향 조정이 동반될 수 있을 것”이라며 “물가 안정 경로 속 민간소비 부진에 대응해 7~8월 중 첫 금리 인하가 단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안예하 키움증권 연구위원은 “내수 부진과 2분기 말 미 연준의 금리 인하 가능성 등을 감안할 때 한은 또한 하반기부터 금리 인하에 나설 것으로 예상한다”며 “앞으로는 물가 둔화 속 인하 시점에 대한 논의가 부각될 것으로 판단하며, 2분기 소수의견 등장 여부에 관심이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다만 미 연준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와 한은 금통위의 금리 결정 시기를 고려하면 5월 인하 가능성도 여전히 열어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강승원 연구원은 “5월 FOMC에선 금리 인하 신호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데, 6월에 한은 (통화정책방향) 금통위가 열리지 않는다는 게 고민스러운 지점”이라며 “5월 금리 인하 신호 확인 후 한은이 두달 넘게 아무 것도 안해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이를 고려하면 여전히 5월 금리 인하 단행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