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독일 등 유럽 지역에 국한된 규제로 여겨졌던 ‘플랫폼법’의 입법 바람이 아시아 지역에서도 퍼지기 시작했다. 플랫폼법은 시장 지배력이 큰 거대 온라인 플랫폼의 반칙 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것이다. 자사우대·최혜대우·멀티호밍·끼워팔기 등 4대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일본에선 지난해 모바일 플랫폼을 대상으로 한 별도 경쟁법 제정이 필요하단 방향성이 설정된 데 이어, 이르면 이달 말 관련 법안이 마련돼 의회에 제출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을 필두로 호주·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 여타 아시아 지역에서도 정부 주도로 플랫폼법 제정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은 ‘플랫폼 공정경쟁 촉진법(가칭)’ 정부안 발표에 임박해 반대 여론이 거세지며 돌연 공개가 잠정 보류되는 등 ‘공회전’을 거듭하고 있다.

구글·아마존·페이스북·애플·넷플릭스 등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로고.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 없음. /로이터

◇ 日 경쟁당국, 빅테크 독과점 규제 법안 곧 제출

19일 외신과 현지 업계 등에 따르면, 일본 경쟁당국(공정취인위원회·JFTC)을 비롯한 관계부처는 모바일 분야의 지배적 기업을 통제하기 위한 규제 법안을 마련해, 이르면 이달 말 혹은 늦어도 4월 중 일본 의회에 제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JFTC의 국장급 관계자는 지난달 경쟁법 전문 미디어 엠렉스(MLex)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모바일 생태계의 경쟁 환경을 정비하기 위한 규칙을 만들고 있다”며 “JFTC가 의회에 법안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단 개별 사례들을 어떻게 감독할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세부 사항은 현재 작업 중”이라고 덧붙였다.

해당 법안으로 규제하려는 것은 주로 구글·애플 등 글로벌 빅테크(Big Tech) 기업의 독과점 문제다. 우리에게 ‘플랫폼’이라고 불리는 용어가 일본 경쟁당국에서는 주로 ‘모바일 생태계’(the mobile systems)라고 지칭된다는 차이가 있는데, 법의 취지는 우리 정부가 추진하려는 플랫폼법과 유사하다. 애플리케이션(앱) 스토어, 브라우저, 검색, 운영체제(OS) 등 4가지 서비스 분야에서의 독점 행위를 제재하는 내용이 담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일본 정부가 플랫폼 시장에서의 경쟁 환경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조사 결론을 내린 데 따른 후속 조치다. 앞서 일본 총리 직속 디지털시장 경쟁본부(DMCH)는 지난해 6월 ‘모바일 생태계 경쟁력 평가에 관한 최종 보고서’를 통해 “기존 경쟁법으로는 (플랫폼 사업자들의 경쟁 저해 행위를 판단하기 위한) 최종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위법성이 입증될 수 있다더라도 그동안 유사한 행위가 반복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존 경쟁법적 접근과는 다른 ‘사전 규제적’ 성격의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는 우리 공정거래위원회가 밝힌 플랫폼법 입법 취지와도 상당 부분 동일한 인식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아시아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일본 경쟁당국이 플랫폼법 입법을 추진하며 기준을 제시하면 (여타 지역에도) 파급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고 했다.

육성권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이 지난달 24일 정부세종청사에서 플랫폼 독과점 폐해 방지를 위한 '(가칭)플랫폼 공정경쟁 촉진법' 제정 추진과 관련한 설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호주도 올해 입법 관측… 한국 공정위, 거센 반발 직면

일본에 이어 아시아 지역에서의 유력한 다음 주자로는 호주가 꼽힌다. 호주 경쟁당국인 ACCC(Australian Competition and Consumer Commission)는 지난해 말 “플랫폼들의 영향력 확장이 소비자의 선택을 제한하고, ‘락인’(Lock-in·다른 플랫폼의 출현을 어렵게 만드는 것) 하는 등의 위험을 초래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하고, 아마존·애플·구글·메타·마이크로소프트 등 기업의 급속한 확장에 대응한 새 경쟁법이 필요하다는 의사를 밝혔다.

호주 역시 올해 안에 입법을 추진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 공정위와도 플랫폼법 입법 관련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컨퍼런스콜을 수시로 진행하고 있다. 이 밖에 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여타 아시아 지역에서도 유사한 입법 추진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지난해 말 공정위가 플랫폼법 입법 방향을 공식화하고, 추진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러나 최근 정부안 공개에 임박해 거센 반대 여론에 부딪히며 한발 물러선 상태다. 당초 밝혔던 시장 지배적 사업자 ‘사전 지정’ 원칙까지도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재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반대 의견이 있는 교수 등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마련된 정부안 방식에 대한 피드백을 마지막으로 수렴해 보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소상공인연합회에서 열린 '공정거래위원회-소상공인연합회 현장 간담회'에 참석한 모습. 이날 간담회에서는 온라인플랫폼-소상공인 거래 등에 대해 논의됐다. /뉴스1

◇ 양분된 학계… 최대 우려 점은 “애먼 국내 빅테크 잡을라”

학계에서는 플랫폼법에 대한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다. 정부의 의지와 계획대로 법 제정이 추진될 수 있을지 현재로선 의문이다. 플랫폼법을 반대하는 측에선 해당 규제의 화살이 글로벌 빅테크가 아닌, 우리나라 플랫폼 기업으로 향할 수 있다는 지점을 가장 우려한다.

전현배 서강대 교수(한국산업조직학회 수석 부회장)는 “경제학자들도 빅테크의 지나친 인수합병(M&A)을 통해 시장 진입 자체를 막는다는 문제를 규제하고, 소상공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에 대해선 동감을 한다”면서도 “국내에선 빅테크라고 할만한 기업이 네이버인데, 만약 해외 빅테크에 비해 규모가 크지도 않은 국내 플랫폼이 사전 지정되면 경쟁과 혁신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는 격”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선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며 “더구나 윤석열 정부가 내걸고 있는 자율 규제나 역동 경제 기치와도 엇박자”라고 했다.

한국산업조직학회장인 권남훈 건국대 교수는 “우리는 전 세계에서 드물게 국내 플랫폼이 글로벌 플랫폼과 성공적으로 경쟁하는 나라”라며 “시장 관점에서나 국익 관점에서나 무조건 외국을 흉내 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소비자와 사업자에게 어떤 이득이 있고 제약이 되지 않을지를 공정위가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한 게 이번 논란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정부의 방향성에 동의하는 의견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우리나라 플랫폼 기업이 유독 과도하게 공정거래법을 위반하는 측면이 있고, 이런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소상공인도 많다는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으로 판단하기엔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는데, 처리할 사건에 비해 인력이 부족한 공정위의 고질적 문제를 생각한다면 플랫폼법은 꼭 필요한 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