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생활물가가 소비자물가보다 더욱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식품과 에너지 가격이 급등한 것이 원인인데, 선진국에서 해당 품목의 물가 상승률이 더 낮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생활물가의 높은 증가세가 통화정책에도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라 앞으로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25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지난해 월별 생활물가지수 상승률은 2023년 4월부터 7월까지 4개월을 제외하고 항상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을 웃돌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생활물가와 소비자물가의 상승률 격차는 평균 0.3%포인트(p)였으며, 생활물가지수가 5.8%로 치솟았던 작년 1월에는 상승률 격차가 0.8%p에 달했다.

◇ 당근 29%·사과 24% 올라… 전기·가스도 20% 넘게 ‘쑥’

한국에서 생활물가가 더 가파르게 오른 것은 식품 가격이 급등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연간 식품가격은 5.6% 오르면서 전체 지수의 상승세를 견인했다. 품목별로 보면 당근(29.0%)과 사과(24.2%), 귤(19.1%), 파(18.1%) 등이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그래픽=정서희

식품 외 항목(2.9% 증가) 중에서는 공공요금이 크게 오르면서 생활물가를 끌어올렸다. 지난해 전기료는 22.6%, 도시가스비는 21.7% 오르면서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지난해 기본요금이 오른 택시비(13.0%) 등도 영향을 줬다.

특히 식품물가와 전기료, 도시가스비는 작년 한 해 꾸준히 소비자 물가 상승률을 상회한 것으로 나타났다. 식품물가는 12개월 내내 5% 안팎으로 오르면서 소비자물가보다 상승률이 높았다. 전기료와 도시가스비 상승률은 9월까지 각각 20%가 넘는 상승률을 기록했다. 작년 12월 13.9%, 5.6%로 내렸지만, 여전히 소비자물가(3.2%)보다 상승 폭이 크다.

이처럼 생활물가가 소비자물가보다 더 높으면 인플레이션 국면에서 중앙은행이 적정 수준보다 길게 긴축 기조를 유지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물가안정목표(2%) 수준으로 낮아지더라도 생활물가가 높게 유지되면 국민이 느끼는 물가 수준이 여전히 높기 때문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이런 점을 지적했다. 이 총재는 지난달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생활물가와 소비자물가지수(CPI) 인플레이션과 차이가 평균적으로 한 0.7%포인트(p) 정도 된다”면서 “(CPI 상승률이) 3% 미만으로 내려가더라도 국민이 체감하는 물가는 거의 4% 수준”이라고 했다. 그는 “CPI가 충분히 낮아져야 생활할 때 느끼는 고통도 줄어든다”고 덧붙였다.

◇ 美·英은 소비자물가가 더 높아… 식품·공공요금 상승률 내림세

우리나라와 달리 다른 나라에서는 생활물가가 소비자물가보다 상승률이 낮다. 미국은 지난해 연간 식품물가 상승률(5.8%)이 소비자물가 상승률(4.1%)을 상회했지만, 작년 9월부터 식품물가 상승률이 3%대로 접어들면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밑돌고 있다. 에너지요금(energy services)은 지난해 2.8% 올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하회했다. 작년 6월부터는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오히려 물가가 내리고 있다.

미국의 한 월마트 매장에서 장을 보는 미국인들. /조선DB

영국은 식품물가 상승률은 높지만 최근 공공요금이 내림세를 보이면서 생활물가를 끌어내리고 있다. 영국의 지난해 월별 식품물가 상승률은 10%를 훌쩍 넘기면서 12개월 내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웃돌았다. 그러나 작년 초 80% 넘게 올랐던 전기·가스요금이 10월부터 3개월 연속 20% 넘게 내리면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큰 폭으로 하회하고 있다.

선진국의 생활물가가 낮게 유지되는 원인으로는 우선 식품의 탄력적인 수입량 조절이 꼽힌다. 농산물 수출대국인 미국은 지난해 수출량보다 더 많은 농산물을 수입하면서 식품 물가를 낮췄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지난해(회계연도 기준) 농산물 수출은 1787억4700만달러, 수입은 1953억7300만달러를 기록했다. 직전 2년간 농산물 수입량보다 수출량이 더 많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장기화 등으로 물가가 불안정하자 수입량을 대폭 늘린 것으로 풀이된다.

국제유가의 변동이 공공요금에 곧바로 연동되는 점도 영향을 준다. 미국은 한국보다 국제 에너지 가격이 소비자가격에 반영되는 속도도 빠르다. 2022년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직후 치솟은 국제유가가 반영되면서 물가가 크게 뛰었지만, 유가 하락과 함께 빠르게 안정세를 찾았다. 같은 시기에 영국도 공공요금 물가가 크게 뛰었지만, 요금 상한제 등 규제를 강화하기보다는 에너지효율을 높이고 절약을 유도해 체질 개선에 나섰다.

◇ 한국은 정반대… 농민 보호 등 구조적 문제 얽혀

반면 우리나라는 식품과 공공요금 시장 모두 정반대로 운영되고 있다. 농산물 시장은 개방됐지만, 일부 품목의 경우 수입 전에 거쳐야하는 동식물 위생·검역조치(SPS) 등을 완화하지 않아 사실상 수입이 불가능하다. 최근 물가 급등으로 ‘금(金)사과’라는 별명이 붙은 사과가 대표적이다. 미국과 독일, 일본 등 11개국이 한국을 대상으로 사과 수출을 추진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진 국가가 없다.

지난 10일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에서 시민들이 사과를 살펴보고 있다. /뉴스1

공공요금은 정부가 물가 상승을 통제해 국제유가가 반영되는 속도를 늦추고 있다. 유가 급등기에 정부는 전기·가스요금 인상폭을 제한했고, 유류세 인하 등도 추진했다. 물가 상승기 초반에는 이런 정책 덕분에 물가가 급격하게 오르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뒤로 갈수록 누적된 에너지 비용 상승분이 소비자가격에 조금씩 반영되면서 물가 하락 속도를 늦추고 있다.

장기적으로 생활물가의 변동성을 낮추기 위해서는 농산물 수입과 공공요금 정상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크다. 농작물의 해외 수입을 제한하면 농민들의 소득을 보전해 국내 생산기반을 유지할 수 있고, 공공요금 가격 인상을 통제하면 소비자들은 당장 비용 인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물가를 관리해야 하는 한은의 고심은 깊어질 전망이다. 이창용 총재는 앞선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나라는) 식료품 수입을 거의 안 하고 있어 국내 사정이 변하면 (식료품 가격도) 많은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고 전반적인 (가격) 수준이 높다”면서도 “이런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식료품 수입을 하기 시작하면 농민 보호 등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