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아라비안 나이트(천일야화)를 대표하는 이야기인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서 주인공 알리바바는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을 외워 도둑들이 보물을 숨겨둔 동굴로 들어갔다. 1970년대 한국 경제의 성장 발판이 된 중동이 다시 한번 한국에 기회의 땅이 될 전망이다. 중동의 부국들이 그동안 축적한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포스트 오일 시대’ 준비를 본격화하면서, 기술을 확보한 우리 기업의 프로젝트 수주 및 시장 진출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중동의 변화와 가능성, 그리고 점검 포인트를 3회에 걸쳐 게재한다.

쌍용건설이 지은 '원 레지던스' 옥상에서 바라본 두바이의 랜드마크 '두바이 프레임./윤희훈 기자

2023년 12월 12일 오전 10시(현지시각)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7대 토호국 중 하나이자 최대 도시인 두바이의 신흥 부촌인 ‘키파프’의 ‘원 레지던스’의 옥상에 올랐다. 옥상에선 두바이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른 ‘두바이 프레임’(액자 형태 전망대 건물)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마천루들 사이로는 삼성물산이 지은 세계 최고(最高) 빌딩 ‘부르즈 할리파’가 보였다.

옥상에 조성된 풀에서는 러시아계로 보이는 입주민 2명이 수영을 하고 있었다. 옥상 위에 마련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조깅 트랙’(World’s Highest Running Track)은 뜨거운 햇볕 때문인지 이용하는 사람은 보이지는 않았다.

44층 높이의 2개 동을 이은 이 건물은 밖에서 봤을 때 외형이 아라비아숫자 ‘1′을 닮아 ‘원 레지던스’라고 이름이 붙었다. 2019년 수주한 이 건물의 계약액은 1억6700만달러 규모다.

원 레지던스 바로 앞에선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한 터닦이 작업이 한창이었다. 키파프 플롯(plot) 4·6 단지에 레지던스를 짓는 공사로, 역시 쌍용건설이 수주했다. 레지던스 두 동을 올리는 프로젝트의 수주액은 2억7000만달러(약 3500억원)에 달한다. 건물의 이름은 두바이 시내의 정원형 공원인 ‘두바이 가든 글로우’가 맞은 편에 있다는 것에 착안해 ‘파크뷰 레지던스’라고 지었다.

쌍용건설이 UAE 두바이에 지은 '원 레지던스'(左), 원 레지던스 앞에서 진행 중인 파크뷰 레지던스 공사(右). /윤희훈 기자

2023년 3월부터 공사를 시작한 6단지는 이미 바닥 기초를 다지고 건물을 쌓아 올리기 위한 크레인까지 설치가 된 상태다. ‘인스방파’(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에서 들어온 인부들은 철근을 점검하거나, 각종 건설자재를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6단지보다 공사 시작이 5주 가량 늦은 4단지는 지반 다지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틀 뒤인 14일 카타르 도하로 향했다. 도하의 북동쪽에 위치한 신도시 ‘루사일’에서는 현대건설이 ‘루사일 플라자 타워’ 공사의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다. 루사일 플라자 타워는 70층(고도 301m) 건물 2동과 50층 건물(고도 215m) 2동 등 총 4개 동으로 구성된다.

이중 현대건설은 70층 건물 2개 동의 공사를 맡았다. 50층 건물은 현지 업체가 공사를 맡았다. 공사 개시 시점은 동일했지만, 현재 공사 진척은 현대건설이 맡은 70층 건물이 더 빠른 상황이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중동의 발주처가 한국 기업을 선호하는 이유가 바로 이처럼 빠른 공정 진행 속도”라고 말했다.

현대건설은 루사일 플라자 타워의 외관 공사 이후 진행될 내부 오피스 마감공사도 수주를 기대하고 있다. 올해 1분기 중 입찰공고가 나올 하마드 병원 리노베이션 공사와 8월 입찰서 발급이 예상되는 폴리프로필렌 플랜트 사업도 수주를 노리고 있다.

사우디에서도 수주 낭보가 나오고 있다. 현대건설은 아람코와 토탈의 정유합작사인 사토프(SATORP)의 석유화학플랜드 프로젝트 2건을 수주, 작년 6월 착공했다. 두 프로젝트의 계약액은 51억달러(6조5000억원)에 달한다.

현대건설은 삼성물산과 함께 네옴시티 ‘더 라인’의 지하에 터널을 뚫는 공사도 진행 중이다. 이 공사는 전체 지하 터널 170㎞ 중 28㎞를 뚫는 사업이다. 총공사비는 10억달러(1조3000억원)다.

카타르 도하 북동쪽의 신도시 루사일에 건설 중인 '루사일 플라자'. 왼쪽 2개 건물이 현대건설이 짓는 70층 빌딩이고, 오른쪽 건물이 현지업체가 짓는 50층 빌딩이다. 오른쪽 역시 건물은 2동 이지만, 원근법 때문에 뒷건물이 가려져 있다. /윤희훈 기자

◇ 기회의 땅, 중동…불어오는 변화의 바람

중동의 문이 다시 열리고 있다. 중동은 1970~80년대 석유개발과 다양한 건설·토목 프로젝트로 한국 경제 성장의 주춧돌이 됐던 곳이다. 석유산업을 기반으로 국부를 쌓은 중동은 이제 ‘포스트 오일’ 시대를 맞아 경제 체제 전환을 준비 중이다. 이러한 전환은 한국에 새로운 기회 요인이 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와 UAE, 카타르 등 중동 3개국에서 따낸 수출·수주 계약은 792억달러(한화 107조원)에 달한다. 아직은 양해각서(MOU) 수준에 그치는 계약도 포함돼 있어, 샴페인을 일찍 터트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지만 장기 저성장에 놓인 한국 경제의 재도약을 견인할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중동의 변화를 최일선에서 주도하는 나라는 사우디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왕세자가 실권을 잡은 이후 사우디는 ‘비전 2030′이라는 국가 장기 계획을 추진 중이다. 비전 2030은 석유 의존 경제 구조에서 탈피해 ‘저탄소·IT 기술 및 제조업 기반 국가’로 만들겠다는 게 핵심이다.

비전 2030의 대표적인 프로젝트로는 ‘네옴시티’가 꼽힌다. 사우디 서북부 타북 지역에 들어서는 ‘네옴시티’는 크게 3개의 프로젝트로 진행된다. 높이 500m의 건물을 170㎞ 길이로 짓는 직선 도시 ‘더 라인’과 세계 최대 수상구조물 첨단 산업단지를 만들겠다는 ‘옥사곤’, 타북지역 산악지대에 스키 등을 즐길 수 있는 친환경 관광단지 ‘트로제나’이다.

외국에선 SF 영화에 나올법한 현실성이 떨어지는 프로젝트라는 지적이 나오지만, 사우디는 빈 살만 왕세자가 제시한 꿈을 쫓아 우직하게 걸어가는 중이다.

2023년 12월 15일(현지시각) 저녁 리야드 시내의 관광·오락 명소가 된 불리바드 시티에서 현지인들이 여가를 보내고 있다. /윤희훈 기자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와 함께 사회·문화 개혁도 이뤄지고 있다. 여성 운전과 개인 여행을 허용했고, 히잡과 니캅 등 이슬람 의복에 대한 규정도 완화했다. 요즘 리야드 시내의 ‘핫 플레이스’로 자리잡은 ‘불리바드’와 ‘로샨 프론트’에선 히잡을 쓰지 않거나, 차도르를 풀어헤치고 재킷처럼 입고 다니는 사우디 여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슬람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 성향의 국민들은 빈 살만 왕세자의 개혁에 반발심도 갖고 있지만, 30대 이하 젊은 세대는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리야드에서 우버 택시를 운행하는 압둘마지드씨는 “왕세자의 개혁 정치로 리야드가 변화하고 있다”면서 “젊은 층은 그의 개혁 정치에 기대와 지지를 보내고 있다. 나 역시 그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현지에선 사우디의 다음 문화 개혁 조치가 주말 요일 변경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현재 사우디는 이슬람 규정에 따라 ‘금토’를 주말 휴일로 삼고 있다. 이를 해외 주요국의 기준에 맞춰 ‘토일’로 전환할 것이란 전망이다. 주말 기준이 달라 기업 소통이 장기간 끊기는 게 외국 기업 유치에 부정적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 시내 최고층 건물인 킹덤센터. /윤희훈 기자

◇ 기업 유치하려 세제 혜택 안기는 사우디… “16년 만의 FTA로 교역 확대 기대”

이러한 사회 변화는 외국 기업의 사우디 진출을 가로막는 ‘문화 장벽’을 허물 것으로 보인다. 리야드에서 30년 이상 거주한 한 한인 사업가는 “이슬람 규정을 최우선시하는 ‘할랄’(허용된 것)과 ‘하람’(금지된 것), 명확한 사업 진행 스케쥴을 알려주지 않는 ‘인샬라’(신의 뜻) 문화는 외국에서 온 기업인 입장에서 상당히 난처한 부분이었다”이라며 “일종의 ‘사우디스카운트’로 작용했는데, 빈 살만 왕세자가 실권을 잡으면서 많은 부분이 개선되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 기업을 유치하기 위한 제도 개편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사우디 정부는 12월 초 자국으로 역내 지역 본부를 이전하는 기업에 대해 법인 소득세를 30년 면제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존에 발표한 지역 본사에 대한 세금 면제 혜택에 더해 지역 법인의 소득세와 해당 법인의 활동에 대한 원천징수세를 30년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모하메드 알 자단 사우디 재무장관은 “2029년 동계 아시안 게임과 2030년 엑스포와 같은 주요 행사를 개최하기 위한 준비와 메가 프로젝트를 포함한 모든 분야의 프로젝트에 더 많은 국제 기업이 참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중동에선 이러한 사우디의 행보를 UAE를 견제하고 아랍의 허브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선언으로 보고 있다. 특히 한 발 앞선 개혁으로 중동의 금융 중심지가 된 두바이를 겨냥한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중동 진출을 준비하는 한국 기업 입장에선 베이스캠프를 시장 개방도가 높고 비즈니스 사고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두바이에 낼 것인지, 세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우디에 낼 것인지 선택지가 늘어난 셈이다.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산업부 장관 후보자)과 자심 모하메드 알 부다이위 걸프협력이사회(GCC) 사무총장이 지난해 12월 28일 서울 강남구 한국무역협회에서 열린 한-GCC FTA 타결 공동선언문 서명식에서 서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K-상품의 중동 시장 진출 길도 넓어질 전망이다. 한국은 작년 10월 한-UAE 간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 협상을 체결한 데 이어, 12월에는 한-GCC 자유무역협정(FTA)을 최종 타결했다.

사우디, UAE, 카타르, 쿠웨이트, 오만, 바레인 등 중동 6개국의 관세 동맹 경제협력체인 GCC와의 FTA 체결은 2008년 협상을 시작한 지 16년 만의 성과이다. 한-GCC FTA는 에너지·자원, 기업방문, ICT, 과학기술, 보건산업, 농·임·수산업, 건설 인프라, 바이오경제, 스마트팜, 시청각서비스, 항공서비스, 첨단산업 등 12개 분야의 협력 체계를 마련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GCC는 현재까지 싱가포르와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외엔 FTA를 체결한 곳이 없다. 중국과 일본 등 경쟁 국가들보다 한발 앞서 중동 시장을 선점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후보자인 안덕근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한·UAE CEPA 타결에 이어 GCC와의 FTA 까지 타결하면서 ‘신 중동붐’을 확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면서 “한·중동 협력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바로 올해부터 GCC 6개국과의 교역·투자 확대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