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경정예산(추경)안 편성 없이 역대급 세수 결손 사태를 수습해 보겠다는 정부의 계획을 실행할 방안이 구체화하고 있다. 외국환평형기금(외평기금)의 재원을 공공자금관리기금(공자기금)으로 보내고, 이를 다시 일반회계로 넘겨 부족한 수입을 충당하는 이른바 ‘외평기금 동원’ 방식이다.

전례가 거의 없는 낯선 재정 동원 방식이 등장하자, 당장 야당을 중심으로 정치권에서는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외환 관리를 위해 존재하는 외평기금을 끌어다 쓰는 것이 분식회계와 다를 바 없단 주장과 향후 환율 변동성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판 등이 골자다. 그러나 최근의 환율 흐름과 재정 운용 방식을 참고할 때 악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조선DB

◇ ‘정부 내 은행’ 같은 존재 ‘공자기금’ 거쳐 세수 충당

12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다음주 초 ‘세수 재추계’ 결과와 함께 세수 결손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 충당 방식을 공개할 방침이다. 올해 1~7월 국세수입 실적(217조6000억원)을 바탕으로 추산하면, 올해 세수 결손액이 60조원 안팎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 중 40%인 지방교부금을 제외하면 중앙정부가 쓸 돈은 36조원가량 모자란 것이 된다.

재정이 모자란다고 하면 다음 시선은 ‘어떻게 메울지’에 자연히 쏠린다. 세입을 줄여 계획을 다시 짜는 ‘감액 추경’을 하는 방식을 제외하곤 크게 세 가지 방식이 거론된다. 편성한 예산을 쓰지 않는 ‘불용(不用)’, 여윳돈을 의미하는 ‘세계(歲計) 잉여금 활용’, 그리고 이번에 논란되고 있는 ‘기금 활용’이다.

우리나라 재정은 일반적으로 예산이라 일컬어지는 ‘일반회계’와 ‘특별회계’, 그리고 ‘기금’으로 칸막이가 쳐져 운용된다. 기금이란 특정 목적을 위해 운용된단 점에서 특별회계와 비슷하지만, 부담금·출연금 등 다양한 수입원을 통해 탄력적 집행이 가능하단 차이가 있다. 정부는 현재 외평기금·주택도시기금 등 총 68개 기금을 운용하고 있다.

이 중에는 여타 여유 재원이 있는 회계·기금에서 ‘예금’처럼 돈을 받아 굴려주거나, 부족한 회계·기금에 ‘대출’을 내주는, 마치 정부 내 ‘금융기관’(은행)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공자기금’이 존재한다.

공자기금은 그렇다면 어디서 돈을 마련할까. 상당수(60% 정도)는 국채 발행을 통해 조달한다. 공자기금은 이렇게 마련한 돈을 일반회계나 각종 기금에 빌려줄 수 있다. 빌려준 기금으로부터 당연히 이자도 받는다. 이렇게 내주는 대출금의 절반 가까이를 빌려 가는 곳이 바로 외평기금이다.

정부는 외평기금이 공자기금으로부터 지고 있던 빚을 일부 조기 상환해 공자기금을 불리고, 이를 다시 일반회계로 이전시켜 세수 부족에 대응하는 용도로 쓸 구상을 하고 있다. 간단히 도식화하면 ‘외평기금→공자기금→정부 일반회계’ 식의 흐름이다.

그래픽=손민균

◇ “외평기금 내 쌓아둔 ‘원화’, 당분간 쓸 일 없다”

그렇다면 정부는 외평기금을 헐어 써도 되는 것일까. 여러 기금 중에서도 특히 외평기금이 활용 대상으로 콕 집어 거론되는 이유는, 마침 ‘강달러 기조’라는 현재의 환율 상황이 도와주고 있어서다.

외평기금은 환율이 급등락 위기를 겪을 때 상황에 맞춰 원화나 달러를 팔아, 환율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됐다. 외평기금의 자산 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269조4000억원에 이르는데, ‘원화’와 ‘외화’가 함께 쌓여 있다. 단 이들의 비율은 비공개다. 이들 자산의 대부분(267조1000억원)이 공자기금으로부터 빌린 부채로 구성돼 있다.

지금처럼 원·달러 환율이 계속 오르는 상황이라면, 외평기금은 갖고 있던 달러를 팔아 그만큼 원화를 산다. 이렇게 하면 치솟던 원·달러 환율이 다소 진정된다. 반대로 2009~2018년처럼 원·달러 환율이 지속해 하락하는 경우라면, 외평기금이 갖고 있던 원화를 팔아 달러를 사는 방식으로 환율의 급락을 막는다. 이 때 외평기금의 외화 자산(외환보유액)은 증가하게 된다.

작년부터 급격히 상승해 온 원·달러 환율 때문에,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외환당국은 달러를 팔고 원화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외평기금을 운용했다. 즉 지금 외평기금에 원화가 대거 쌓여 있는 상태다. 앞으로 환율이 급락할 요소가 적다면 그간 쌓아둔 원화는 당분간 ‘실탄’으로 쓸 일이 없게 된다. 그러니 이를 다시 공자기금으로 넘겨도 되겠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달러 인덱스가 105까지 돌파한 지금 ‘달러 강세·원화 약세’ 기조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정부의 인식이 바탕에 깔린 셈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내년 전반적으로 시장이 어떻게 급변할지는 모르지만, 기조를 보면 현실적으로 2010년대 같은 (갖고 있던 원화를 매도해야 하는) 원화 약세 상황이 재현될 것 같지는 않다”며 “설사 (낮은 확률이지만) 환율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대비한 자금은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6월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07회 국회(임시회) 제2차 본회의 경제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뉴스1

◇ 美日선 일반적… 환율조작국 조건 거스르는 긍정 효과도

야당에선 이것이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돈을 끌어 오는 분식회계와 같다고 비판하지만, 외국에선 이런 방식이 생각보다 자주 재원 마련에 동원된다.

미국에는 1930년대 만들어진 환율안정기금(ESF·Exchange Stabilization Fund)이 있는데, 미 재무부 장관이 의회 승인 없이 사실상 마음대로 쓸 수 있다. 2020년 코로나 사태 때 피해를 본 기업에 대출과 보증을 지원하는 데 쓰이기도 했고, 올해 초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가 터졌을 때도 모든 예금의 보호 한도를 보장해 주는 조치에 ESF를 활용하자고 거론된 바 있다.

우리가 벤치마킹한 일본의 외환자금 특별회계(外国為替資金特別会計)도 마찬가지다. 기재부에 따르면, ‘제로 금리’에 따라 금리 구조상 이익을 보는 일본의 외평기금은 매년 2조엔(약 20조원) 정도를 세계 잉여금처럼 일반회계로 넘겨 활용한다고 한다.

신인도 측면에서도 외평기금이 지닌 원화를 줄이는 것은 당장에는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제기된다. 달러가 아닌 원화의 규모를 줄이는 건 외환보유액과 상관 없기 때문이다. 외환보유액에 있는 달러를 팔아서 부족한 재정을 메웠다면 큰 문제가 되지만, 정부가 검토하는 건 그런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환율조작국’을 판단할 때 ‘12개월 중 8개월간 국내총생산(GDP)의 2%를 초과하는 달러 순매수’ 여부를 하나의 고려 요소로 판단하는데, 되레 외평기금의 원화를 갚아버렸다고 한다면 매수 개입을 할 여지가 줄어들게 된다. 한 정부 관계자는 “오히려 예전처럼 강하게 매수 개입을 하지 않는 정상적인 나라가 됐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11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코스피 지수 등이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 “장기적으론 불안… 외평기금 유효성 재고민 시점”

일부 전문가는 정부의 구상이 단기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묘수’처럼 보일 순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카드라고 지적한다. 이강구 한국개발연구원(KDI) 재정·사회정책연구부 연구위원은 “환율의 방향이 올해 말까지는 쉽게 바뀌지 않겠지만, 과연 내년 그리고 그 후에도 장담할 수 있느냐”라며 “위기가 닥치기 전에 쌓아놓는 방파제 같은 것인데, 안전한 방법은 아니다”라고 했다.

선례를 남기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다. 이 연구위원은 “언제든 정책당국이 외평기금을 끌어서 쓸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길 수 있다”며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외환시장 참가자들의 심리가 또 달라질 수 있어 불확실성을 키운다”고 말했다.

이참에 외평기금의 존재 이유를 다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단 지적도 있다. 김학수 KDI 재정·사회정책연구부 선임연구위원은 “특정 환율 수준을 타깃으로 정해놓고 유지 수단으로서 언제든지 활용한다는 게 외평기금의 취지인데, 과거 고정환율이나 준 고정환율 제도를 유지할 때나 유효한 얘기”라며 “외환보유액이 충분한 상태에서 굳이 외평기금을 따로 분리해 가져갈 필요성을 못 느낀다면 (유지에 대한 재검토가) 안될 것도 없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