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신용평가사 피치(Fitch)가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하향 조정하며 금융시장에 불안감이 커졌다. 미국의 신용등급이 하향 조정된 것은 2011년 8월 5일 또 다른 신평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신용등급을 내린 이후 1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피치의 신용등급 강등 소식이 전해진 당일 우리나라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이 15원가량 치솟아 1300원 부근에서 마감했다. 국고채 가격은 내렸다. 2011년과 비교할 때 환율이 급등한 양상은 비슷하나, 과거 국내 채권시장이 강세를 보였던 것과는 반대의 움직임이다.

미국 신용평가사 피치(Fitch). /로이터=연합뉴스

◇ 원·달러 환율 급등해 1300원 턱밑

3일 서울외국환중개에 따르면, 전날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14.7원 오른 1298.5원에 마감했다. 이는 지난달 10일(1306.5원) 이후 약 한 달 만에 기록한 최고치다. 하루 상승 폭으로는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의 여파가 미쳤던 지난 3월 24일 16.0원이 뛰었던 이후 가장 크다.

피치의 신용등급 강등 소식이 전해진 직후 글로벌 달러는 약보합을 보이다가, 이내 강세로 돌아섰다. 한 국가의 신용 등급이 떨어지는 것은 원래 해당 국가 통화의 약세 요인이지만, 미 달러는 ‘기축통화’라는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안전 자산 선호 심리가 부각되면 다시 강해지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에 자연히 원·달러 환율도 장중 크게 뛰었다.

S&P가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사상 최초’로 강등했던 12년 전에도 환율 흐름은 비슷했다. 원·달러 환율은 S&P의 발표 전인 2011년 8월 4일 1062원이었는데, 15일에는 1078원, 9월 26일에는 1194원까지 치솟았다. 당시 원화 가치의 달러화 대비 절하율은 세계 주요 20개 통화 중 7번째로 큰 2.6%를 기록했다.

지난 2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명동점 딜링룸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하고 있다. /뉴스1

◇ 국고채 금리는 일제히 상승 마감

한편 서울 채권시장에서 전날 국채 금리는 일제히 상승(채권가격 하락)했다. 국고채 3년물은 3bp(1bp=0.01%p) 상승한 연 3.677%로, 5년물과 10년물은 각각 5bp, 6.6bp 뛴 연 3.717%, 연 3.793%로 마감했다. 20년물과 30년물도 각각 5.2bp, 3.5bp 상승해 연 3.724%, 연 3.678%로 거래를 마쳤다.

반면 12년 전 당시 한국의 국채 금리는 미끄러져 내렸다. 국고채 3년물 금리는 2011년 8월 5일 하루에만 16bp 급락했다. 그해 8월 4일 연 3.77%였던 3년물은 10일간 45bp 하락했고, 한 달이 지난 9월 14일까지 하락세가 이어져 연중 최저인 연 3.31%까지 떨어졌다. 10년물도 연 4.12%에서 당일 연 4.01%까지 떨어졌고, 9월 중엔 연 3.5%까지 내렸다.

과거엔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이 국내 채권시장에 강세 재료로 작용했지만, 지금은 다른 양상인 것이다. 전문가들은 거시경제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당시에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완화적 통화 정책을 추진하던 때”라며 “그리스 디폴트(채무불이행) 등 미국·유럽 등지에 신용 리스크가 산재해 있어서 꼭 신용등급 사태가 아니더라도 (안전한) 채권 자체가 선호됐던 시기”라고 했다.

반대로 지금은 각국이 통화 긴축을 지속하고 있다. 또 최근 경기 침체에서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점도 다르다. 안전 자산이라는 국채의 매력이 과거만큼 크게 부각되지 않는 셈이다. 조용구 신영증권 연구원은 “8월부터 미 국채 발행량이 늘어난다는 소식도 (국채 금리 상승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이투자증권 제공

◇ “2011년 같은 ‘패닉’ 없다” 대체적 평가

시장과 정부에서는 이번 미국 등급 하향 조정의 후폭풍이 2011년 당시보다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바라본다. 단기적으로 시장 변동성이 커질 수는 있겠지만, 과거의 ‘학습 효과’가 있는 데다 지금의 경기 상황이 당시보다는 더 견조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피치의 결정을 두고 현지에서 ‘터무니없다’는 반응이 잇따르는 분위기도 시장의 파장을 잠재우는 요소다.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과 모하메드 엘 에리언 알리안츠 수석 경제 고문 등 유명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정보가 없이 갑작스럽게 신용등급을 강등했다며 “황당하고 부적절하다”고 비난했고, 재닛 옐런 재무장관도 “하향 조정에 쓰인 데이터가 옛날 것”이라며 반발했다.

향후 파장을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박상현 연구원은 “신용등급 하향 조정이 미 국채 금리의 추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경우, 단기적으로 시장의 스트레스가 커질 수 있다”며 “만약 이번 강등 이슈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미국 경제에 큰 타격을 줘 불안을 야기한다면, 경기 침체에 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오면서 미 연준의 추가 금리 인상과 관련한 고민도 더 깊게 만들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