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국 중앙은행이 물가를 잡기 위해 다시 긴축 고삐를 죄고 있다. 지난해부터 기준금리를 가파르게 인상했음에도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과 노르웨이가 기준금리를 0.5%포인트 '깜짝' 인상했고, 튀르키예는 금리를 한 번에 6.5%포인트나 끌어올렸다.

글로벌 통화정책이 새 긴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국제통화기금(IMF) 2인자로 통하는 기타 코피나스 부총재는 "중앙은행들은 인플레이션을 목표치인 2%까지 끌어내리는 데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란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고금리 기조가 장기화할 조짐에 경기 침체 우려도 다시 커지고 있다.

앤드루 베일리 영국 중앙은행(BOE) 총재 / 연합뉴스

◇ 힘겨운 물가와의 싸움…유럽 중앙은행, 동시다발 금리 인상

29일 금융시장에 따르면 유럽 중앙은행들은 이달 앞다퉈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영국 중앙은행(BOE)은 지난 22일(현지시각)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하는 빅스텝을 단행했다.

당초 시장에서는 0.25%포인트 인상이 유력하다고 봤지만, 금리 결정 전날 발표된 영국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8.7%로 예상치를 크게 상회하자 BOE는 과감하게 빅스텝을 택했다. 현재 영국 기준금리는 연 5.0%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이후 15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영국 통계청은 지난달 물가가 치솟은 이유에 대해 "항공료, 여행비 등 레저와 문화 상품 가격과 중고차 가격 상승이 5월 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앤드루 베일리 BOE 총재는 "물가상승률이 너무 높다"며 "경기 침체를 원하지 않지만, 인플레이션을 낮추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금리를 올리지 않으면 나중에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했다. 물가 안정에 초점을 둔 매파적(통화긴축 선호)인 기자회견 이후 골드만삭스 등 주요 투자은행은 BOE가 8월에도 금리를 0.5%포인트 올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르웨이 중앙은행도 같은날 기준금리를 연 3.75%로 0.5%포인트 올리면서 추가 인상을 시사했다. 5월 물가상승률이 6.7%로 사상 최고치까지 치솟자 시장 예상을 깨고 빅스텝을 밟은 것이다. 노르웨이 중앙은행은 "지금 금리를 인상하지 않으면 인플레이션이 고착화할 수 있다"며 하반기 기준금리를 연 4.25%까지 올리겠다고 예고했다. 스위스 중앙은행도 이날 금리를 연 1.75%로 0.25%p 인상했다.

그간 물가와 집값 폭등에도 금리 인하를 고집해온 튀르키예도 2년 3개월 만에 금리 인상에 나섰다. 튀르키에 중앙은행은 22일(현지시각) 기준금리를 기존 8.5%에서 15%로 대폭 끌어올렸다. 최근 재선에 성공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40%에 육박하는 물가상승률을 낮추기 위해 경제정책 전환을 주문한 뒤 나온 첫 금리 인상 결정이다.

그래픽=손민균

◇ IMF "물가 잡으려면 금리 더 올려야"

높은 수준의 물가가 지속되는 이른바 '끈적한 인플레이션(sticky inflation)'이 기승을 부리면서 중앙은행들도 긴축 고삐를 풀지 못하는 분위기다. 대부분 국가에서는 물가상승률이 지난해 중순 정점을 찍고 소폭 내려왔지만, 변동성이 큰 식료품과 에너지 가격을 제외한 근원물가는 고강도 긴축에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아 인플레이션 억제가 어려운 상황이다.

경기 침체를 우려해 연초 금리 동결로 전환했던 캐나다와 호주는 물가상승률이 반등하자 이달 초 금리 인상을 재개했다. 지난 15일 기준금리를 4.0%로 0.25%포인트 올리면서 8회 연속 금리 인상을 단행한 유럽중앙은행(ECB)도 "다음달 추가 인상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도 이달 기준금리를 15개월 만에 동결했지만, 연내 두 차례 인상 가능성이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IMF를 포함한 해외 기관은 각국 중앙은행들이 경기 침체가 우려되더라도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물가 고착화로 인한 부작용이 일시적인 성장 둔화보다 장기적으로 경제 전반에 미치는 피해가 더 크다는 이유에서다. 기타 고피나스 IMF 부총재는 "통화정책은 계속 긴축 기조를 유지한 뒤 핵심 인플레이션이 분명한 하락 경로에 있을 때까지 제한적인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지난 25일 발간한 연례 경제 보고서에서 세계 각국의 인플레이션이 고착화될 수 있다면서 추가 금리 인상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BIS는 "기준금리 인상이 가장 어려운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며 "금리가 시장 기대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더 오래 머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5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 한은은 금리 동결 유력…통화정책 '각자도생'의 길로

주요국이 긴축 행보를 이어가고 있지만 한국은행이 금리 인상을 재개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다른 국가와 달리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최근 3%대로 내려왔고, 올해 중반에는 일시적으로 2%대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등 뚜렷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김지나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금리 인상을 재개한 국가들과 한국의 근본적인 차이는 인플레이션"이라며 "국내 물가도 근원물가가 덜 떨어지는 상황이지만, 한국은행의 예상 범위 내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한국은행이 물가로 인해 7월에 추가 인상에 나설 가능성은 현재로서 낮다"고 말했다.

한국 외에도 상당수 아시아 국가들은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거나 금리 인하를 시작하는 등 미국·유럽 중앙은행과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1년간의 긴축 효과가 국가마다 다르게 나타나면서 금리 결정도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은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 효과가 기대에 못 미치자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를 결정했다. 인민은행은 지난 20일 사실상 기준금리로 여겨지는 대출우대금리(LPR)를 10개월 만에 전격 인하했다. LPR 1년 만기는 연 3.55%, LPR 5년 만기는 연 4.20%로 각각 0.1%포인트씩 내렸다. 일본 중앙은행은 이달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