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으로 제롬 파월 의장이 이끄는 미국 연준이 3월에 빅스텝을 단행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조선비즈DB

미국 스타트업의 자금줄 역할을 해오던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이 몰고 올 후폭풍에 경제부처와 금융당국이 긴장의 끈을 조이고 있다. 정부 안팎에서는 이번 SVB 사태로 국내 벤처캐피탈과 스타트업이 타격을 입고 금융 부문까지 연쇄적으로 부실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경계하는 모습이다. 미 연방준비제도(연준·Fed)발(發) 긴축으로 외환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추가 리스크 요인이 터진 데 대한 불안감도 감지된다. SVB와 투자 포트폴리오가 비슷한 중소은행의 연쇄 도산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국내 역시 중소은행의 자금조달 여건이 악화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은 13일 오전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SVB 파산으로 금융시장 불확실성이 확산되고 있다”며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SVB 파산요인, 사태 진행 추이, 미 당국의 대처, 국내 금융시장 및 실물경제에 대한 영향을 면밀히 점검하라”고 지시하는 등 정부의 대비 태세 강화를 주문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진행된 수출투자책임관회의에서 “미국 재무부 등 관련 당국의 실리콘밸리은행 예금 전액 보호조치 발표 등 신속히 대응하고 있다. 이번 사태가 글로벌 금융·경제 전반의 리스크로 확산되지 않고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면서도 “향후 여파에 대한 불확실성이 여전히 큰 만큼 우리 금융시장과 실물경제에 대한 부정적 영향이 최소화되도록 관계기관 합동으로 실시간 모니터링을 한층 강화하겠다”고 했다. SVB 사태의 국내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지만, 혹시 모를 연쇄적인 파장은 대비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3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중앙동에서 수출 활성화를 위한 분야별 추가 지원 방안 및 주요 품목별 수출·투자 이행 등을 점검하는 수출투자책임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뉴스1

◇ 국내 VC·스타트업도 타격… 연쇄 부실 ‘우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의 자금 젖줄 역할을 해오던 SVB가 파산하면서 시장에서는 벤처캐피탈(VC)과 스타트업들의 투자난으로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SVB는 지난 40년간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 성장을 도운 은행으로, 스타트업이 가장 많이 거래하는 은행 중 하나다.

투자 업계에선 이번 사태로 VC와 스타트업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투자 자체가 위축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지 진출한 국내 스타트업과 VC에도 악영향이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매출이 없이 외부 투자금을 토대로 기술 개발 및 임상 시험 등을 하던 기술 벤처들의 사업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추가 투자금 확보가 어려워 회사가 멈출 경우, 투자를 했던 기업과 투자사 모두 피해를 받게 된다. 이와 관련, 김용범 전 기재부 차관은 페이스북에서 “실리콘밸리 은행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압도적”이라며 “이 은행의 파산이 실로콘밸리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스타트업계에 주는 충격은 다음주부터 서서히 수면위로 드러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 정부에서 지원책을 발표했지만 채권과 투자까지 전액 보전하긴 어려울 것”이라며 “벤처캐피탈과 스타트업에서 시작해서 피해가 연쇄적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벤처업 호황의 수혜를 입었던 주식 시장에도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11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위치한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 정문을 보안 요원이 지키고 있다. /연합뉴스

◇ 외국인 자금 이탈 가속화하면 환율도 출렁

외환시장의 불확실성도 커졌다. 이날 원·달러 환율은 다행히도 일단 하락세를 보였다. 미 연준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빅스텝을 단행할 가능성이 작아졌다는 재료에 시장이 우선 주목하면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22.4원 내린 1301.8원에 마감했다.

하지만 SVB 사태의 파급 양상에 따라 환율도 어떤 경로를 보일지 장담할 수 없다. 외환당국이 우려하는 시나리오는 SVB 사태가 향후 글로벌 위험 회피 심리를 키우는 방향이다. 이 경우 외국인 자금 이탈을 가속해 원화 약세(원·달러 환율 상승)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외국인 채권 투자 자금은 3개월째 빠져나가면서 자금 이탈 현상이 지속되는 흐름이다.

더욱이 요근래 원화 가치는 크게 추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달 1일부터 지난 8일까지 한 달 새 원화 가치는 6.8% 하락했는데, 이는 일본 엔(-5.3%), 중국 위안(-2.9%), 유로화(-3.0%)보다도 큰 낙폭이다.

원화 가치 하락뿐만 아니라 국내 채권 금리를 높일 유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SVB 사태가 국내 채권시장으로까지 전이되면, 지난해 말 ‘레고랜드 사태’ 때와 같이 기업의 유동성 경색 현상이 재발할 수 있다.

이러한 경색 현상을 막기 위해 금융당국은 현재 지난해 자금 경색 사태 때 실시했던 시장 안정화 조치의 연장을 검토하는 분위기다.

◇ 글로벌 은행 ‘뱅크런’ 확산…PF 대출 부실에 불지를까

이번 사태가 SVB에서 그치지 않고 여타 글로벌 중소은행으로까지 번질 가능성도 또 다른 리스크로 꼽히고 있다. 국제금융센터는 이날 보고서를 통해 “미국의 여타 중소은행 불안 확산 여부, 보유채권 미실현 손실이 많은 선진국 은행들에 대한 투자자 행보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SVB와 같이 스타트업·벤처캐피탈을 대상으로 비슷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가진 글로벌 금융기관에서 유사한 ‘뱅크런’ 사태가 발생할 것으로 우려하는 것이다.

안남기 국금센터 종합분석실장은 “은행 예치금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예금 인출이 몰리면 증권·채권 같은 자산을 팔아야 하는 은행들은 좀 불안할 것이라고 본다”며 “미국뿐 아니라, 여타 선진국에서도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이어 “SVB와 비슷한 규모의 중소은행, ‘자산·부채의 만기 불일치’가 큰 은행, 단기 유동성이 적은 은행 등에 대한 투자자·예금자들의 우려가 확대될 경우 연쇄 불안 소지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이미 연쇄적인 뱅크런으로 확산하는 분위기다. 미 금융당국의 ‘예금 전액 보증’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날 뉴욕주에 있는 시그니처은행이 추가로 폐쇄됐다. 시그니처 은행은 SVB보다 먼저 청산한 실버게이트 은행과 더불어 디지털자산(가상화폐) 주요 거래 은행으로 꼽힌다.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퍼스트 리퍼블릭은행까지 뱅크런 위기설이 돌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등 규제가 적용돼, SVB와 유사한 영업 구조로 인한 뱅크런 발생 가능성은 낮은 상태다. 다만 정부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부실 우려가 여전한 상황과 맞물려, 국내 금융회사의 자금 조달 여건이 악화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13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한 외환 딜러가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관련 뉴스를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시장에선 2008년 금융위기 사태와 비교할 때, 시스템 전반적인 위기로까지 확산되지 않을 것이라고 대체적으로 보고 있다. 조용구 신영증권 연구원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는 금융기관 전반에 내재해 있던 주택저당증권(MBS) 부실화 문제가 촉발 요소였다”면서 “지금은 부실화한 상황이라기보다 미 국채 금리가 올라가면서 캘리포니아주(州) 내 특수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는 은행에 타격을 준 것으로, 자산의 디폴트 리스크가 다르다”고 했다.

미국이 이날 오전 발표한 긴급 조치가 시장을 얼마나 빨리 안정시킬지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앞서 미 재무부·연준·연방예금보험공사(FDIC) 등은 이날 “고객이 맡겼던 돈을 보험 대상 한도와 무관하게 전액 보증한다”는 대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기재부 관계자는 “보호 조치에 대해 시장이 안정을 찾을지 여부가 주목된다”며 “우리 시장에 미칠 영향을 한동안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SVB 사태가 직접적인 시스템 리스크를 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저금리 시대 누적된 ‘금융 불균형’이 조정되면서 생기는 파열음이 계속될지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