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前) 정부 시절 꼬였던 한·일 관계가 개선될 거라는 기대감이 커진 가운데 한국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에도 청신호가 들어왔다는 평가가 나온다. 세계 최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불리는 CPTPP를 주도하는 국가가 일본이기 때문이다. 그간 일본은 기존 CPTPP 회원 11개국 중 유일하게 한국 가입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여왔다.

통상 전문가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CPTPP 합류를 추진하는 중국보다 한국의 가입이 빨라야 하는데, 한·일 관계 회복의 물꼬를 튼 지금이 적기라고 조언한다. ‘만장일치’ 찬성이 필요한 CPTPP의 특성상 정말로 가입할 생각이라면 회원국이 한 곳이라도 적을 때 들어가는 게 유리하다.

부산항 신선대부두와 감만부두에 수출입 컨테이너가 쌓여있다. / 연합뉴스

◇ 日과 관계 악화에 진도 나가지 못한 CPTPP 가입

8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통상 당국인 산업통상자원부는 한·일 정부가 지난 6일 양국 관계를 일본의 수출 규제 시작 시점인 2019년 7월 이전으로 되돌리기로 한 뒤 그간 지지부진했던 두 나라 간 산업 협력 이슈 파악에 나섰다. 인플레이션과 공급망 재편 등 글로벌 경제를 둘러싼 대외 여건이 안 좋은 만큼 분위기가 조성됐을 때 서로 힘을 합칠 방법을 발굴하겠다는 것이다.

정부 안팎에서는 지난해 탄력이 붙는 듯하다가 뜨뜻미지근해진 한국의 CPTPP 가입이 다시 추진력을 얻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CPTPP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11개 국가가 참여하는 초대형 FTA다. 2017년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 블록을 지향했던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서 탈퇴하자 2018년 일본을 중심으로 나머지 11개 국가가 출범시킨 경제 협력체다.

정부는 문재인 정권 말이던 작년 4월 15일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열어 CPTPP 가입 추진 계획을 관계부처 합동으로 의결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후 절차인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보고를 마치지 못했다. 대외적으로는 CPTPP를 주도하는 일본과 관계가 나빴고, 내부적으로는 농어민 발발이 거셌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022년 11월 13일(현지시각)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뉴스1

◇ 세계 GDP 13% 차지하는 메가 FTA

현재 CPTPP 의장국은 싱가포르지만, 출범을 주도한 일본 입김이 절대적인 상황이다. 그간 일본은 한국의 CPTPP 가입 추진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산케이 신문은 2019년 3월 일본 정부가 한국의 CPTPP 가입을 막을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나머지 10개국이 공개적으로 “한국 가입을 환영한다”고 밝힌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이번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 배상 해법 발표를 계기로 대외적 걸림돌은 사라졌다는 게 통상 당국의 분석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출신인 서진교 GS&J 인스티튜트 원장은 “한국과 일본 정부 모두 글로벌 경제 둔화의 어려움 속에서 경기를 부양하고 공급망을 안정화해야 한다는 공통된 과제를 안고 있다”며 “양국이 모처럼 찾아온 관계 회복 기회를 잘 살린다면, 향후 그 결과물은 CPTPP 가입이란 성과로 다가올 것”이라고 했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2019년 기준 11개 CPTPP 회원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1조2000억달러로, 전 세계 GDP의 12.8%에 해당한다. 무역 규모는 5조7000억달러로 글로벌 무역액의 15.2%다. 또 한국 수출액에서 CPTPP 11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3.2%다. 서진교 원장은 “경제 효과도 중요하지만, CPTPP가 회원국 경제·통상 정책의 투명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제도의 선진화를 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3월 5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 연례회의에 참석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리커창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 “中 협상 오래 걸릴 수밖에…먼저 들어가야”

중국이 CPTPP 가입 절차를 밟고 있다는 사실도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란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오는 배경이다. 중국은 2021년 9월 CPTPP 가입 의사를 밝혔다. 당시 중국은 미국·영국·호주가 새로운 3자 안보 동맹인 ‘오커스(AUKUS)’를 발족하자 그 즉시 CPTPP 가입 신청서를 수탁국인 뉴질랜드에 제출했다. 전체 회원국의 동의가 필요한 만큼 중국이 CPTPP 가입에 실제로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다만 성공 여부와 별개로 중국이 움직인 이상 한국도 가입 신청을 서둘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바이든 시대 국제 통상 환경과 한국의 대응 전략’ 보고서에서 “한국이 최소한 중국보다는 먼저 CPTPP에 가입해야 한다”고 했다. CPTPP에는 투명성·개방 등 중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 조항이 많다. KDI는 중국의 가입 협상부터 시작되면 그 협상은 장기간 정체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등이 2022년 4월 4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앞 광장에서 CPTPP 가입 저지 집회를 벌이고 있다. / 뉴스1

한국 내부적으로는 CPTPP 가입에 따른 피해를 주장하는 국내 농수산업계의 불만이 정부가 넘어야 할 산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21년 12월 13일 한국종합농업단체협의회는 성명서를 통해 “후발주자인 만큼 이전보다 높은 수준의 농산물 추가 개방이 불가피한데, 피해 산업에 대한 배려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며 “한국의 CPTPP 가입은 대한민국 농업, 나아가 먹거리 주권 포기나 다름없다”고 했다.

정부는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과제 20번(산업 경쟁력과 공급망을 강화하는 신(新)산업통상전략)에 ‘CPTPP 가입 추진’을 명시한 만큼 농어민 설득 작업에도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CPTPP 가입 추진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피해가 예상되는 부분, 또 피해가 실제 발생하는 부분에 대해 충분히 보상하면서 진행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