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 경제는 1%대 저성장이 불가피하지만, 정책 대응에 있어 선택지는 많지 않다. 인플레이션이 잡히지 않으면 한국은행은 물가 안정을 우선 순위에 두고 인플레이션 대응에 주력해야 한다."
세계적인 경제 석학인 배리 아이켄그린(Eichengreen·70) UC버클리 교수는 중앙은행의 최우선 과제는 물가 안정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달 초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전미경제학회(AEA) 연례총회에서 만난 그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통제하지 못해 신뢰를 잃으면 다른 정책 목표는 손도 댈 수 없다"고 말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물가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는 점에서 "이미 신뢰를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연준이 2021년 인플레이션이 '일시적'(transitory)이라는 역대급 오판을 했고, 그 결과 지난해 물가상승률이 약 40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연준이 신뢰를 회복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시장 기대와 달리 올해 피벗(pivot·통화정책 방향 전환)은 없을 것이라고 본다"며 "연준은 인플레이션이 확실하게 통제될 때까지 금리 인상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1997~1998년 외환위기 때부터 한국 경제를 연구한 대표 지한파(知韓派) 경제학자다. 외환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의 수석 자문위원을 지냈고, 2012년에는 1987년 이후 한국 경제의 변화를 다룬 책 '기적에서 성숙으로: 한국 경제의 성장'을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자문위원, 전미경제연구소 연구위원, 한국은행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그는 올해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질 것이냐는 질문에는 "현 시점에서는 확답을 주기 어렵다"고 답했다. 그만큼 불확실성이 크다는 의미다. 그러나 중국 경제는 가파른 코로나 확산으로 혼란에 빠지면서 2분기 연속 역성장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평가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중국의 경기 침체는 세계 경제는 물론 한국 경제에도 악재"라고 했다.
올해 세계 경제가 직면한 최대 리스크(위험)로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을 꼽았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미·중 갈등이 극에 달해 양국의 관계가 무너질 경우 세계 경제는 극심한 쇼크(severe shock)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미국과 중국 간 대립이 다음 블랙 스완을 촉발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블랙스완(Black Swan)이란 경제에 큰 충격을 주는, 예측하기 어려운 위기를 말한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미 뉴욕대 교수가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한 해 전인 2007년 동명의 저서를 통해 소개한 개념이다.
◇ 다음은 아이켄그린 교수와의 일문일답.
―세계 경제가 올해 침체에 빠질 것이라고 보는가.
"아무도 그 질문에 대해 속 시원한 답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지표가 각자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은 경기 침체 가능성이 높지만, 아직 침체에 빠진 것은 아니다. 이번 겨울이 예상보다 따뜻한 덕에 에너지 수급 문제가 크지 않았다.
미국 경제도 엇갈리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노동시장은 여전히 견조한 가운데 임금 상승률이 낮은 수준이라는 점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기업 활동을 가늠하는 구매자관리지수(PMI) 등은 악화되는 추세다. 노동시장은 강한 반면, 기업 부문은 침체되는 모습이다.
반면 중국은 코로나19 유행으로 경제 활동이 위축되면서 올해 1분기 마이너스(-)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총생산(GDP)이 2개 분기 연속 감소하면 경기 침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올해 상반기만 보면 중국이 침체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이번 AEA 총회에서 경제학자들은 코로나 쇼크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겪은 세계 경제가 중대한 전환점(turning point)에 맞이했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한 생각은.
"코로나 팬데믹은 동의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의견은 조금 다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분명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줬지만, 모두 예상보다 충격에 잘 적응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유럽은 기대 이상으로 에너지 위기에 잘 적응했다. 주요 7개국(G7)과 한국, 대만 등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 노력을 지속하면서 단합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거의 1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 글로벌 경기는 침체에 빠지지 않았다. 당초 전쟁 충격이 컸던 점을 감안하면 이런 결과는 매우 긍정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세계 경제가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보긴 어렵다."
―올해 세계 경제가 직면한 최대 리스크는 무엇인가.
"미국과 중국의 정치·경제적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우려된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극에 치달아 양국의 관계가 붕괴되면 세계 경제는 극심한 쇼크(severe shock)를 겪을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촉발한 충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와 강도가 클 것이다.
세계 최대 경제대국인 두 나라가 교역을 중단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올해 현실화될 것이란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중국에 부과했던 관세를 유지하기로 한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다. 나아가 고성능 반도체와 관련 생산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도 적용했다. 중국도 이에 대응해 여러 보복 조치를 취하고 있다. 다행히 중국이 리튬을 포함한 희토류의 수출을 금지하진 않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보장할 수 없다. 미·중 무역전쟁이 세계 경제의 '블랙스완'(Black Swan·예상하지 못한 위기)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다."
―이 밖에 유의해야 하는 경제 리스크로는 어떤 게 있을까.
"비은행 금융부문의 부실화 가능성이다. 우리는 직전에 겪은 위기는 곧잘 예방하지만, 다음 위기를 막는 데 능숙하지 않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우리는 은행부문을 강화했다.
그러나 최근 영국 연기금 위기에서 보듯이 비은행 금융권에서 취약성이 드러나고 있다. 사모펀드와 벤처 캐피탈, 암호화폐 부문에서도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비은행 금융권 중 어디서 부실이 터질지 모르겠지만 곳곳에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규제 당국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지만, 너무 늦게 움직였다. 영국은 이제야 연기금 위기를 다루기 시작했고 최근 미국도 암호화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번 총회에서 발표한 논문의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세계 경제: 분리인가 혼란인가?(Global economy: uncoupled or unhinged?)'인데, 세계 경제가 둘 중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보는가.
"느슨하게 결합(loosely coupled)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고 하고 중국 역시 미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은 지리적, 정치적, 역사적 이유로 양쪽 모두와 교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됐다."
―주요 기관들이 한국의 2023년 경제 성장률을 줄줄이 낮추고 있다. 한국 경제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주요 기관이 내놓은 올해 한국 성장률 전망치는 1~2% 사이고, 대부분 1.5% 안팎의 수치를 제시했다. 한국의 수출의존도가 높고, 세계 경기가 하강 국면을 맞이하면서 수요가 전반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예상 가능한 합리적인 수치다.
올해 한국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요인 중 하나는 중국을 둘러싼 불확실성이다. 최근 시장에서는 중국 경기가 향후 2~4개월 동안 위축된 뒤 코로나 집단면역이 형성되면 강하게 반등할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또 다른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가 나와 경제 활동이 다시 마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팬데믹 이후 경제학자들에게 "최대 리스크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다 같이 "바이러스"라고 답했다. 바이러스(전염병)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세계 경제도 크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올해 중국 경제도 코로나19 확산 양상에 휘둘릴 것으로 보인다."
―불확실성이 큰 국면에서 한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현재로서는 선택권이 많지 않다. 통화·재정정책을 완만하게 조정하는 방법이 있는데, 인플레이션이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는 가능하다. 인플레이션이 예전보다 둔화되면 더 많은 정책 지원이 이뤄질 수 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잡히지 않으면 인플레이션 억제부터 해야 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작년 말 "물가 안정에 중점을 둔 통화정책 운용 기조를 지속하겠다"고 한 발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올바른 접근법이다.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 신뢰를 잃으면 그외 다른 목표는 달성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연준은 이미 신뢰를 잃었다. 연준의 인플레이션 예측은 전부 틀렸고, 그 결과 물가를 제때 통제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연속으로 금리를 올리는 등 인플레이션 억제에 주력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연준이 이르면 연말에 금리인하에 돌입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연준이 피벗(pivot·통화정책 방향 전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준은 인플레이션이 확실하게 통제될 때까지 금리 인상을 멈추지 않고 지금의 통화정책 기조를 이어나갈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잡힌 뒤에야 (경기 침체 등) 다른 문제에 대해 걱정할 수 있다."
―한국이 통화·재정정책 외 쓸 수 있는 카드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해온 대로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고래 사이에서 유연하게 헤엄치면서 양쪽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수출 시장 다변화 노력도 지속해야 한다.
한국 경제의 근본적인 고민은 생산성 정체다. 향후 한국 경제의 경쟁력과 성장은 생산성 향상에 달려있다. 생산성을 저해하는 저출산·고령화, 소규모 사업체로 이뤄진 서비스업 구조, 입시 위주의 교육, 상대적으로 낮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 등 고질적인 문제를 중장기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게 급선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치적으로 오랫동안 한 길을 걸어야 하는데 한국은 정권이나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정책도 확 바뀐다. 그런 점에서 한국 정치는 미국만큼이나 나쁘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