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창립한 제일무역은 철강·비철금속·화학·기계장치 등 다양한 상품을 수출하는 전문무역상사다. 조우현 대표를 비롯한 12명의 한국 본사 임직원이 이탈리아·영국·인도 등 전 세계 20개 이상 국가와 협업한다. 이 업체는 2019년부터 성장 잠재력이 큰 아세안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 중 인구 2억7000만명의 인도네시아를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인도네시아 정부는 자카르타 등 주요 도시의 심각한 대기오염 문제를 해결하고자 내연기관 자동차와 이륜차를 전동화 차량으로 전환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제일무역은 현대케피코·LG에너지솔루션·이쓰리모빌리티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인도네시아 전력청과 연간 5만대 이상의 전기이륜차 수주 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조 대표는 2021년 인도네시아 모터쇼 당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 앞에서 현대케피코의 구동시스템이 적용된 전기이륜차를 직접 시연하기도 했다. 2021년 552억원이던 매출액을 지난해 990억원까지 끌어올린 제일무역은 올해 1400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올해 수출이 작년보다 4.5% 감소할 것이라는 정부 전망과 달리 인도네시아 등을 공략 중인 이 회사는 매출 50% 신장을 자신한다.

2019년 가을 제일무역과 현대케피코, 인도네시아 파트너사 관계자들이 인도네시아 전기이륜차 시장 진출 관련 전략회의를 하고 있다. / 제일무역

2022년은 수출 강국 대한민국에 쉽지 않은 해였다. 글로벌 경기 둔화에 따른 수요 감소는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라는 믿을 만한 인증도 맥을 못 추게 했다. 그런데 수출업계를 억누른 긴장감은 단순히 경기 둔화에 따른 교역 여건 악화 때문만은 아니다. 미·중 무역 갈등이 촉발한 진영화·블록화 흐름은 이미 수년 전부터 우리 기업들에 수출 전선을 확대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안겼다. 제일무역의 인도네시아 진출 사례는 그 절박함이 낳은 성공적인 결과물이다. 윤석열 정부가 아세안·유럽연합(EU)·중동 등의 수출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도 이런 흐름에서 봐야 한다.

동남아 등으로의 수출 전선 확대는 탈(脫)중국의 또 다른 표현이다. 대(對)중국 수출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를 벗어나는 게 지상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탈중입아(脫中入亞)’ 혹은 ‘차이나 플러스 원(China Plus 1)’ 전략으로 부른다. 중국에 진출했던 자본이 포스트 차이나(Post-China)로 불리는 아세안으로 몰리는 걸 뜻한다. 금융투자업계에서 자주 쓰는 표현이지만, 교역 분야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 무역 생태계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크다. 그러나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과 자국 우선주의 기조는 한·중 두 나라 교역 구조를 점점 바꿔놓을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중국 역시 주요 첨단산업을 내재화해 한국산 중간재 의존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다. 10년 전 600억달러를 웃돌던 우리나라의 대중 무역수지 흑자가 지난해 12억달러대로 고꾸라진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22년 11월 15일(현지시각) 인도네시아 발리 한 호텔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 9년 만에 50분의 1 토막 난 대중 무역 흑자

한국과 중국이 처음 수교를 시작한 1992년부터 지난해까지 30년 동안 쌓인 대중 무역 흑자는 7066억달러에 달한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 경제가 중국 덕을 톡톡히 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연도별로 끊어서 보면 우리나라의 대중 무역 흑자는 2013년 628억달러를 기점으로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양국 무역 규모가 사상 처음 3000억달러를 돌파한 2021년에도 무역 흑자는 2013년의 절반도 되지 않는 243억달러에 머물렀고, 작년에는 중국 경기 둔화 이슈까지 맞물리면서 12억3500만달러로 급전직하했다.

한국의 대중 무역 흑자 감소는 글로벌 경기 하강, 에너지 수입 증가 등의 이슈와 맞물리면서 지난해 우리나라에 사상 최대 규모의 무역수지 적자를 안겼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작년 무역수지 적자는 총 472억3000만달러로 집계됐다. 기존 연간 최대 적자인 1996년의 206억달러를 두 배 이상 넘어선 수치다. 연간 무역수지가 적자를 기록한 것 자체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132억6000만달러 적자) 이후 14년 만에 처음이다.

그래픽=편집부

지난해 8월 한국의 대중 무역수지가 1992년 이후 처음으로 4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하자 한국무역협회는 ‘최근 대중국 무역수지 적자 진단’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반도체 제조용 장비 국산화율은 2021년 말 21%에서 2022년 상반기 32%로 크게 올랐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작년 상반기 대중 반도체 제조용 장비 수출은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51.9% 급감했다. 또 지난해 상반기 대중 교역 품목 5448개 가운데 적자 품목 수는 3835개(70.4%)로, 전년도 상반기(3581개·69.4%) 대비 254개 늘었다.

그간 중국 정부는 반도체 등 주요 산업의 내재화를 꾸준히 시도해왔다. ‘쌍순환’이란 불리는 내수 강화 정책을 앞세워 수입에 의존해온 여러 중간재를 자국산으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 성과가 ‘한국의 대중 무역 흑자 축소’로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중국해관총서에 따르면 지난 26년 동안 한국은 대중 교역에서 흑자를 가장 많이 내는 나라 2위(1위는 대만) 자리를 지켰으나 지난해 대만·호주·브라질에 이은 4위로 주저앉았다. 홍지상 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연구위원은 “대중 무역수지를 개선하려면 차세대 수출 신산업과 관련한 핵심 소재의 안정적인 수입 공급망 체계를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2022년 10월 23일 중국 저장성 항저우 상업지구에 설치된 한 대형 스크린에 시진핑 국가주석이 나오고 있다. / AP연합뉴스

◇ 中 떠난 자리 차지한 베트남…“중동·중남미·아세안 집중 공략”

전문가들은 특히 한국이 교역 네트워크 다변화를 부지런히 시도하면서 대중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는 정치나 이념의 맥락이 아니다. 주요 첨단산업을 내재화해 한국산 중간재 의존도에서 벗어나려는 중국의 산업 정책이 서서히 결실을 보고 있어서다. 우리나라의 대중 무역수지 흑자가 지속해서 감소하는 현상을 단순히 중국 정부의 도시 봉쇄나 원자잿값 급등과 같은 단기 이슈로 치부해선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경고다.

사실 대외 환경 변화에 민감한 기업들은 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한 수년 전부터 리스크 분산 차원에서 탈중국 행보를 지속해왔다. 중국이 빠져나간 우리나라의 최대 무역 흑자국 자리를 베트남이 차지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베트남을 상대로 한 한국의 수출액은 609억8000만달러, 수입액은 267억2000만달러다. 무역수지는 342억5000만달러 흑자로 주요 교역국 가운데 1위에 올랐다. 연간 기준 베트남이 우리의 최대 무역 흑자국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픽=편집부

베트남에 수출하는 주요 품목을 살펴봐도 중국의 중간재 내재화 가속화에 대응하는 한국 산업계의 분투가 엿보인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베트남이 한국으로부터 가장 많이 수입한 품목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메모리반도체, 집적회로 반도체 등 첨단산업과 관련된 것이다. 베트남의 뒤를 미국·홍콩·인도·싱가포르 등이 따랐는데, 이들 국가를 향한 한국산도 자동차·메모리반도체·스마트폰 등 고부가가치 품목이었다.

2018년 1위 흑자국이었던 중국은 2019년 2위, 2020~2021년 3위로 조금씩 떨어지다가 지난해 22위로 확 주저앉았다. 대중 무역 흑자 순위가 20위 밖으로 밀려난 건 1992년 이후 처음이다. 강내영 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중국 내수 영향력이 금융위기 이후 축소되고 있어 앞으로 중국 경기가 회복돼도 대중 무역수지가 흑자 폭을 빠르게 키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22년 12월 22일 베트남 하노이 인근의 삼성전자 법인을 방문해 스마트폰 생산 공장을 점검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정부 “중동·중남미·아세안 시장 집중 공략”

“미·중 간 경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공급망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이 심화하고, 자유무역 체제가 위축하면서 블록화 양상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종전처럼 수출기업이 알아서 잘 클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2022년 11월 23일 제1차 수출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

정부도 통상 환경의 급변을 목도하며 수출 시장 다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미·중 무역 갈등이 한창이던 때 터진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과 뒤를 이어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글로벌 공급망 재편 움직임에 불을 지폈고, 주요국은 자국 우선주의 정책 기조를 강화하며 세계화 시대의 종말을 부추기고 있어서다. 그간 높은 대외의존도를 바탕으로 성장해온 한국으로선 경기 하강 사이클이 끝나더라도 진영화·블록화라는 새로운 트렌드에 적응해야 하는 도전과제를 받은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11월 23일 서울 양재동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서 열린 제1차 수출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작년 11월 23일 정부가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1차 수출전략회의’에서 공개한 수출 추진 전략에는 통상 환경 변화에 적극 대응하려는 정부의 고민이 담겼다. 이 회의에서 정부는 그간 미국·중국 등 기존 주력 시장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교역 비중이 작았던 중동·중남미 등의 문을 앞으로 더 많이 두드리겠다고 했다.

중동의 경우 에너지·인프라·스마트팜 등의 분야로 사업 영토를 넓히고, 중남미에서는 멕시코·에콰도르 등 주요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다. 아세안 지역에선 베트남에 40%가량 편중된 글로벌 공급망을 인도네시아·태국 등으로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도 올해 초 신년사에서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성장이 기대되는 중동·중남미·아세안 시장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