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 한국의 경제 성장률을 1.6%로 전망했다. 지난 6월 발표한 전망치 2.5%에서 0.9%포인트(p) 낮춘 것이다. 한국은행 예상치인 1.7%보다도 0.1%p 낮은 수치다. 정부가 다음 연도 경제 성장률을 한국은행보다 낮은 수준으로 내다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계묘년(癸卯年) 경제 여건이 녹록지 않을 것이란 의미다. 이를 뒷받침하듯 정부는 취업자 수 증가 폭을 올해 81만명에서 내년 10만명으로 대폭 낮췄다.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5%로, 물가안정목표(2%)를 크게 웃돌 전망이다. 우리 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해온 수출도 내년에는 역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이 12월 2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제12차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제1차 국민경제자문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부는 엄중한 상황 인식에 따라 내년도 경제정책의 무게중심을 거시경제 안정과 민생경제 회복에 두겠다고 했다. 고물가·고금리의 거시 환경이 부동산 경기 침체와 금융시장 붕괴 등 시스템 리스크로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걸 막기 위해서다. 경제 시스템 전반이 흔들리면 가계는 닫았던 지갑을 더욱 닫고, 기업은 생산·투자에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거시경제 안정을 위해 정부는 639조원으로 편성된 내년 예산의 65%인 415조원을 상반기에 집행할 예정이다. 정책금융 규모를 495조원에서 540조원으로 45조원 늘려 금융 시장 리스크를 막고, 개인의 채권 투자를 늘려 자금 경색 완화를 유도한다.

또 취득세 중과 완화와 양도세 중과 배제, 규제지역·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 지역 해제 등 다주택자와 실수요자를 위한 규제 완화에도 적극 나설 방침이다. 이와 함께 정부는 대중교통 소득공제율 상향 연장, 학자금 대출금리 동결, 근로시간 단축 적용 연령 상향 등 서민 지원에도 주력한다.

그래픽=이은현

◇ “진단 정확하게” 사상 처음 한국은행보다 낮은 성장률 제시

정부는 21일 오전 서울 청와대 영빈관에서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제1차 국민경제자문회의를 열고 이런 내용이 담긴 ‘2023년 경제정책방향’을 확정·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정부는 내년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1.6%로 제시했다. 이는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1.8%는 물론 한국은행 예상치(1.7%)보다 낮은 수준이다.

그간 정부는 각종 경기 부양 정책의 효과까지 고려해 성장률 전망치를 타 기관보다 낙관적으로 내놓는 일이 많았다. 방기선 기획재정부 1차관은 “현시점에서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국민에게 객관적으로 알리는 게 의미 있다고 봐서 (성장률 전망에) 정책 기대효과를 반영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윤석열 정부 초대 경제부총리인 추경호 부총리는 평소 기재부 직원들에게 “진단은 정확하게, 공개는 솔직하게 하라”고 주문해왔다.

정부는 가파른 금리 인상에 따른 내수 부진과 제조업 경기 둔화, 교역 위축 등으로 세계 경제의 성장세가 크게 약화하고, 이런 대외 여건의 악화가 국내 경기 회복세에도 제약을 가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상반기에는 잠재 수준을 하회하는 성장세가 예상되고, 하반기로 갈수록 점차 회복 흐름을 보일 것”이라고 했다.

그래픽=이은현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5%로 전망된다. 5%를 웃돈 올해와 비교하면 글로벌 원자재 가격 하락과 수요 둔화의 여파로 고물가가 한풀 꺾이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은행의 물가안정목표가 2%를 넘어서는 고물가 흐름이 내년에도 이어진다고 해석하는 편이 옳다. 정부는 “공공요금 상방 압력 확대, 지정학적 불확실성 등에 따른 원자재 가격 변동 가능성 등 리스크 요인이 상존한다”고 했다.

인플레이션에 따른 수요 침체로 내년 수출 증가율은 마이너스(-) 4.5%로 추락할 전망이다. 이미 우리나라 수출은 10~11월 2개월 연속 역성장했다. 고물가와 수출 감소세는 대표적 경기후행지표인 고용마저 흔들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내년 취업자 증가 폭이 10만명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했다. 올해는 81만명에 비해 71만명 줄어들 전망이다.

부산항 감만부두에서 컨테이너 하역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 연합뉴스

◇ “부동산·금융 붕괴 안 돼”…정책금융 540조원 확대 ‘사상 최대’

내년 성장세가 크게 위축할 것으로 전망되지만, 정부는 당분간 물가 안정에 중점을 두고 거시경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정책 조합을 신축적으로 운용할 방침이라고 했다. 확장 일변도의 부양정책이 다소나마 꺾일 듯해 보이는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선제적·적극적인 위기 대응을 위해 내년 상반기 중 재정 65%를 조기 집행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역대 최고 수준이던 2021~2022년의 63%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정부는 특히 국가 경제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부동산·금융 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다. 금융 리스크 방어 차원에서는 정책금융 규모를 495조원에서 540조원으로 45조원 확대하고, 채권 시장 수급 환경을 개선하고자 개인의 회사채 투자에 세제 인센티브를 부여한다. 회사채 시장으로 개인 투자 자금이 들어오도록 해 자금 경색 완화를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국채·지방채·한전채 등의 발행을 줄여 금리 상승 압력을 줄이기로 했다.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현장. / 연합뉴스

금융 위기 대응을 위한 3종 세트도 마련한다. 정부 현물출자 등을 통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재무 건전성을 제고하고, 부실 금융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금융사에 선제적으로 유동성 공급과 자본 확충을 지원하는 ‘금융안정계정’을 예보기금에 설치한다. 또 2025년까지 운용되는 기간산업안정기금(기안기금)의 지원 기한을 연장하고, 필요시 지원 업종을 추가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부동산 경기 침체 방어와 관련해서는 다주택자·실수요자 등에 대한 과도하고 징벌적인 규제를 정상화해 부동산 시장 연착륙을 유도한다. 다주택자 지원책으로는 취득세 중과 완화, 양도세 중과 배제, 대출 규제 완화 등을 마련하고, 실수요자에 대해서는 규제지역·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 지역 해제, 실거주∙전매제한 폐지, 보유주택 주택담보대출비율(LTV) 완화 등의 정책이 추진된다.

이밖에 정부는 임대차 시장의 구조적 안정화를 위해 장기(10년) 아파트 등록임대를 재개하고, 맞춤형 세제 인센티브를 제공해 임대차 시장의 장기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임대 사업자를 육성하는 제도도 도입하겠다고 했다.

그래픽=이은현

◇ 서민 생계비 부담 줄이고 청년 일자리 늘린다

경기 침체 방어와 함께 정부는 내년에 민생경제 지원에도 사활을 건다는 계획이다. 올해 주요국의 급격한 통화 긴축 행보가 글로벌 경기 둔화를 재촉했고, 이런 대외 여건 악화가 2023년 국내 실물경제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민생 어려움을 키울 것이란 우려에서다.

고물가에 신음하는 서민의 필수 생계비 부담을 낮추고자 대중교통의 소득공제율 상향을 연장하고, 차입금 소득공제와 월세 세액공제 등 주거 관련 세제 지원을 확대한다. 또 학자금 대출금리 동결, 유치원비 지원 3년 연장 등 교육 관련 서민 지원책도 마련한다.

서울의 한 고용복지플러스센터를 찾은 시민이 일자리 정보 게시판을 살피고 있다. / 연합뉴스

육아 부담 완화와 관련해서는 근로시간 단축 적용 연령 상향(8→12세), 현재 8세인 육아휴직제도 사용 기간의 완화, 육아휴직 기간 확대(1→1.5년) 등이 검토된다. 또 국민 휴식권 확대 차원에서 현재 공휴일이지만 현행법상 대체공휴일 대상에서는 누락된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의 대체공휴일 지정도 추진된다.

이 밖에 정부는 청년 일자리를 17만개 이상 지원하고, 고령자에게 주는 계속고용장려금·지원금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반복 수급 방지를 위한 구직급여 제도 개선도 이뤄질 예정이다.

추경호 부총리는 “내년에는 해외발(發) 복합위기가 경제 전반에 걸쳐 본격화하면서 상당기간 어려움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정부부터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위기 극복에 앞장서겠다”고 했다. 추 부총리는 “경제계·노동계·정치권 등 각계에서도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조금씩 양보하고 힘을 모아달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