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는 사람들이 금융 안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갖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더글라스 다이아몬드 시카고대 교수는 수상 직후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말했다. 최근 국내외 신용 리스크(위험)가 불거지면서 다이아몬드 교수가 한 말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해외에서는 글로벌 투자은행(IB)인 크레디트스위스의 위기설이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있고, 국내에서는 레고랜드발(發) 자금시장 불안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시장에서는 1년 안에 단기 금융시스템 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전망이 확산되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내년 한국 경제 성장률이 1%대로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최근 급부상한 신용리스크가 국내 경기 경착륙(hard-landing·경기가 갑자기 냉각되면서 주가가 폭락하고 실업자가 급증하는 현상) 압력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 금융·경제 수장들이 28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비상 거시경제금융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 ‘경기침체 신호’ 장단기 금리 역전 지속…CP금리 계속 상승

최근 채권시장에서는 경기 둔화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3년물 금리가 10년물 금리보다 높아지는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대표적이다. 지난 28일 서울채권시장에서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연 3.669%,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연 3.606%를 기록했다. 금리차는 -0.063%포인트로, 5거래일 연속 역전 상태를 유지했다.

일반적으로 장단기 금리 역전은 경기 침체의 전조로 여겨진다. 그간 미국에서는 장단기 금리가 역전된 이후 1~2년 이내 경기 침체가 뒤따랐다. 국내외 기관들은 미국, 유럽, 중국 등의 경기 침체 여파로 우리 경제 버팀목인 수출이 부진한 흐름을 이어가고, 소비가 위축되면서 내년 한국의 경제 성장률이 1%대로 하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부 투자은행(IB)은 올해 국내 무역수지가 2000년 이후 가장 큰 폭의 적자를 낸 점 등을 들어 한국 경제가 내년에 마이너스(-) 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봤다.

강원도가 지급 보증한 레고랜드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부도 사태와 급격한 금리 인상, 한전채 대규모 발행 등의 여파로 기업의 돈줄이 막히는 ‘돈맥경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회사채 신용스프레드(국고채와 AA- 등급 회사채 간 금리 격차) 역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신용스프레드 확대는 기업의 부도 위험이 높아지고 시장에 유동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8일 기준 신용스프레드는 171.1bp(1bp=0.01%포인트)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4월 29일(172bp) 이후 최고치다.

그나마 회사채 금리는 지난달 정부의 ‘50조원+α’ 유동성 지원 발표에 힘입어 최근 소폭 안정됐지만, 기업어음(CP) 금리는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25일 기준 단기 시장금리를 대표하는 CP 91일물 금리는 5.5%로 연고점을 경신했다. 45거래일 연속 올랐다. 연초 1.5% 수준이었던 CP 금리가 올 들어서만 4%포인트 가까이 급등한 것이다.

시장에서는 회사채 시장 냉각에 부동산 경기 침체, 가계부채 문제 등이 맞물리면서 국내 신용리스크를 자극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전문위원은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제외하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대외 리스크와 국내 신용리스크가 동시에 경기 둔화 압력을 높이고 있는 상황”이라며 “신용리스크가 경기 경착륙 압력을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강원 춘천시 하중도 레고랜드가 한산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 연합뉴스

◇ 금융전문가 “1년 내 금융시스템 위기 발생 가능성 높아져”

국내 신용리스크가 고조되면서 빠르면 1년 내 금융시스템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의견도 많아졌다. 한국은행이 국내 금융전문가 72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인 58.3%는 금융시스템 위기를 초래할 충격이 1년 이내에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고 답했다. 지난 5월에는 이렇게 답한 비율이 26.9%에 불과했지만, 6개월 사이 크게 늘었다. 반면 ‘우리나라 금융 시스템 안정성의 신뢰도가 높다’는 답변은 36.1%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금융시스템을 위협할 수 있는 최대 위험 요인으로 높은 수준의 가계부채(69.4%)와 기업의 자금조달 여건 악화에 따른 부실위험 증가(62.5%), 금융기관 대출 부실화 및 우발채무 현실화 우려(48.6%) 등을 지목했다. 특히 자금시장 경색에 따른 기업부도, 저축은행·증권사의 부동산 PF 대출 부실화 등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유동성 위기로 취약 기업부터 도산하기 시작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연쇄 부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김위대 국제금융센터 경제리스크분석부장은 “주요국의 고강도 긴축과 경기 둔화 여파로 내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한계·중소기업 기업들의 부도 건수가 급증할 소지가 있다”며 “그 결과 회사채 디폴트(채무불이행)도 증가하면서 자금시장 신용경색이 심화되고, 금융 불안이 확대될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 기업부도가 현실화될 경우 대량 실업이 동반되면서 경기 연착륙(soft landing·고용 축소를 최소화하는 부드러운 경기 하강) 목표 달성도 어려워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에 정부는 지난 28일 자금시장 경색을 해소하기 위해 국고채 발행을 약 6조원 축소하고, 5조원 규모의 2차 캐피탈콜(자금 투입 요청)을 통해 채권시장안정펀드를 확충하는 등 자금시장 안정을 위한 추가 대책을 내놓았다. 자금 투입 요청에 응한 금융회사에는 한은이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통해 최대 2조5000억원의 유동성(채안펀드 투입 자금의 최대 50%)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CP시장 회복이 지연되는 가운데 연내 상당한 규모의 CP·단기사채가 만기 도래함에 따라 차환리스크가 우려된다”며 “이번 조치가 유동성 경색과 불안심리를 안정시켜 통화정책의 파급경로를 정상화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이번 조치가 급한 불을 끄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연말이 회사채 발행 비수기인 점을 감안할 때 정부 추가 대책의 효과가 나타나려면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봤다. 김상만 하나증권 연구원은 “그간 시장 안정 대책에도 불구하고 단기자금시장이 불안했던 이유는 불리한 발행여건도 있지만, 시기적으로 연말을 앞둔 비수기인 측면도 작용했다”고 말했다. 평소 시중에 자금을 공급하는 연기금과 기관투자자들의 연말 장부마감 기간이 겹치면서 신규투자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이른바 ‘연말 효과’가 시중 유동성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현재 채권시장을 비롯한 자금조달 시장의 위험도가 상당히 높고, 특히 부동산 PF가 많이 엮여 있는 중소 금융사는 유동성 리크스에 취약하다”며 “금융당국이 시장 상황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면서 추가 지원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고, 당분간 이런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