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에서 숨 참듯, 뭍에서도 숨 참으며 살아왔져.
나가 한 번 숨 참으믄, 새끼들 밥상에 음식 하나 더 올라오니까.
그추룩 숨 참고 참고 또 참다보난, 70년이 지났져.”

이달 17일 오후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바닷가의 공연장 겸 레스토랑 ‘해녀의 부엌’. 무대를 바라보고 ‘ㄷ’ 자 형태로 놓인 기다란 테이블 3개와 그 테이블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향해 어두운 장내 어디선가 공연 ‘부엌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노인 독백이 들려왔다. 10세 때부터 무려 80년 동안 해녀 생활을 한 권영희(91) 할머니의 느릿느릿 떨리는 음성.

“우리한테 바다가 뭐냐고? 뭐긴, 우리 부엌이지. 거길 들어가사, 뭐라도 배를 채울 수 있지 아느크냐.” 어수선했던 공간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11월 17일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의 공연장 겸 레스토랑 ‘해녀의 부엌’에서 공연 '부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 제주=전준범 기자

이어 두 배우가 등장하면서 해녀 영희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 대신 먼 바다에 나가 물질하며 가족을 건사해야 했던 소녀 영희, 바다가 삼켜버린 언니를 평생 그리워하는 동생 영희, 물질 도중 갑자기 시작된 진통으로 낚싯배 위에서 출산하게 된 산모 영희, 딸 결혼식에 쓸 뿔소라를 캐러 바다에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엄마 영희.

연출진은 작년까지 종달리 최고령 해녀였던 91세 영희(현재 은퇴)의 일생과 동료 해녀들의 스토리를 한데 엮어 영희라는 캐릭터에 녹여냈다. 바다에 들어가는 게 너무 싫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잔인한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영희의 인생은 모든 제주 해녀 어멍(엄마)의 이야기이자 녹록지 않은 시절을 견뎌온 우리 부모의 이야기였다. 공연 막바지엔 권영희 할머니가 실제로 등장해 관객과 대화한다.

80년 동안 해녀 생활을 한 권영희(91) 할머니가 부엌 이야기 공연 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제주=전준범 기자

◇ 제주 해녀 삶 엿보면서 지역 해산물 요리 즐겨

해녀의 부엌은 공연과 식사를 동시에 즐기는 ‘극장식 레스토랑’이다. 극 중에는 이야기 전개에 맞춰 상외떡(밀가루나 보릿가루에 막걸리 등을 넣어 발효시킨 떡)과 뿔소라 꼬치가 나온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조배기 미역국과 흑돼지 돔베고기, 갈치조림, 뿔소라 젓갈, 군소무침, 갈치속젓 등이 올라간 식사가 제공된다. 이용객은 말린 톳과 모자반, 흑임자죽 등을 별도로 구매할 수 있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수산물 식재료의 90% 이상은 종달리 어촌계에서 생산된다.

해녀의 부엌은 창업자인 김하원(31) 대표와 배우, 공간(홀) 매니저, 부엌팀 등 20여명이 꾸려가는 스타트업의 이름이기도 하다. 종달리 해녀 집안 출신인 김 대표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기 공부를 하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해녀의 부엌을 세웠다. 제주 해녀 문화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까지 됐는데, 정작 이들 해녀가 힘겹게 잡은 해산물은 시장에서 제값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그를 창업의 길로 이끌었다.

김 대표는 “제주 해녀가 생산하는 자연산 톳이 일본으로 수출되는 과정을 보니 양식산 톳과 같은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뿔소라도 마찬가지였다”며 “어렵게 잡은 수산물이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해녀 문화와 지역 수산물을 주제로 한 해녀의 부엌 사업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그는 “해녀 집안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해녀의 위기가 곧 우리 가족의 위기라는 사실도 이 문제에 내가 더욱 관심을 둔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해녀의 부엌에서 공연과 함께 제공하는 식사. / 제주=전준범 기자

해녀의 부엌 건물은 원래 이 지역 활선어 위판장이었다. 어촌인이 점차 줄고 판매가 뜸해지면서 오랜 기간 창고로 쓰이다가 2019년 1월 시작된 해녀의 부엌 덕에 멋진 공연장 겸 식당으로 부활했다. 지금도 건물 외벽 곳곳에는 바닷바람과 세월이 스며들어 있다. 언뜻 겉모습만 봐서는 전국 어촌에 흔히 있는 하얀색 직사각형 공판장과 닮았다.

◇ 어촌 경제 살고 주변 상권도 활기 되찾아

해양수산부는 해녀의 부엌을 제주 어촌 경제공동체 활성화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는다. 김 대표는 지난해 11월 제주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 해녀의 부엌 2호점을 냈다. 두 지점 합쳐 누적 관객 수는 약 4만5000명, 올해 9월 기준 3년 평균 예약률은 97%에 달한다. 연간 매출은 약 10억원이다. 해녀의 부엌이 매입한 해산물은 2021년 기준 14톤(t)이다. 시가보다 20%가량 비싼 가격에 사들인다. 또 김 대표는 종달리와 북촌리 어촌계에 매년 1000만원씩 발전기금을 기부하고 있다.

해녀의 부엌은 과거 활선어 위판장으로 쓰였던 건물을 공연장 겸 식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 제주=전준범 기자

해녀의 부엌 성공은 주변 상권에도 활기를 불어넣었다. 해녀의 부엌에 들른 이들이 인근 바다에서 물놀이하거나 카페·식당을 이용하는 일이 늘어서다. 김태민(66) 종달리 어촌계장은 “과거 종달리는 우도·성산일출봉 등 주변의 유명 관광지에 가는 길목에 있는 동네였을 뿐 관광객이 일부러 찾아와 머물지 않았다”며 “지금은 해녀의 부엌이 종달리를 제주 명소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해수부가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으로 지난 3년간 중단했던 외국인 크루즈 여행객의 국내 입국·하선을 지난달 24일부터 재개한 상황인 만큼 해녀의 부엌을 찾는 외국인 방문객 증가도 기대하고 있다. 이승호 제주 어촌특화 지원센터장은 “외국인이 오면 영문 자막과 통역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며 “외국인 전용 콘텐츠 개발에 더 투자할 것”이라고 했다.

김하원 대표는 해녀의 부엌을 운영하면서 느낀 애로사항도 전했다. 그는 “해녀의 부엌에서 일하는 해녀를 종업원으로 등록하면 이들이 나라에서 받던 어민수당을 못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며 “기업이 지역민을 고용하고 그런 기업을 국가가 지원해준다면 더 많은 기업이 지역민과 협업에 나설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