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금리가 10년 만에 3%대로 올라서면서 그간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가계 빚 증가 추세가 한풀 꺾이는 모습이다. 지난달에만 국내 5대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1조4000억원 줄었다. 10개월 연속 감소세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 인상하는 ‘빅스텝’을 단행한 여파로 대출금리가 7%대로 치솟자, 이자 부담이 커진 대출자들이 빚 상환에 나선 결과로 풀이된다. 이달 한국은행의 추가 금리인상이 예고된 만큼, 향후 가계대출 감소 흐름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자금 흐름은 한국 경제가 디레버리징(deleveraging·부채 축소) 초입 국면에 진입했다는 평가로 이어지고 있다. 가계 부문의 디레버리징은 금융불균형을 완화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고금리로 차주의 이자 상환 부담이 가중되는 가운데 부동산·주식 등 자산가격 하락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저소득층과 한계기업, 부동산 호황기에 빚을 내 집을 산 20~30대 청년층을 중심으로 부채 부실화 가능성이 높아진 부분은 우려되는 대목이다. 가계부채 부실화로 민간소비가 위축될 경우 실물경제도 예상보다 빠르게 냉각될 수 있다.

서울 시내 한 은행 영업점 대출창구 모습. 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 韓 GDP 가계부채 규모 세계 1위

9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6월 기준 한국의 가계신용(빚) 잔액은 1869조4000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그동안 한 번도 줄어든 적 없이 매년 늘어나기만 했다. 지난 2008년 금융위기 등을 거칠 때도 가계부채는 증가세를 지속했다.

경제가 성장하면 가계부채도 덩달아 늘어나기 때문에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한국의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주요국에 비해 지나치게 빨랐다는 점이다.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기간 저금리에 돈을 빌려 부동산·주식 등 과열된 자산시장에 투자하는 현상이 심화된 영향이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세계 최고 수준이며, 증가 속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6배”라고 말했다.

경제 규모 대비 가계부채 비중은 세계 1위다. 국제금융협회(IIF)가 올해 2분기 기준 세계 35개 국가의 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을 조사한 결과, 한국이 102.2%로 가장 높았다. 조사 대상국 가운데 유일하게 가계부채가 GDP를 웃돌았다.

그래픽=이은현

이렇게 쌓인 가계부채가 한국 경제의 뇌관이자 금융불균형 악화의 원인으로 지목된 만큼, 한국은행과 일부 금융권에서는 최근 금리 상승에 따른 가계대출 증가세 둔화 흐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은행과 상호저축은행, 신협 등 비은행을 포함한 금융권 전체 가계대출은 지난해 말 대비 6000억원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는 상반기 기준으로 관련 통계 집계를 시작한 2008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가계대출이 역대 최대폭 증가했던 지난해 상반기(64조3000억원)와 비교하면 대폭 감소했다.

한국은행 고위 관계자들은 가계대출 급증으로 인한 금융불균형 문제가 해소되려면 지금과 같은 가계부채 증가 속도 완화, 나아가 단기간 부채 축소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한국은행은 최근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가계대출이 경제 성장에 맞춰 자연스럽게 늘어나되 명목 GDP 증가 속도 이내로 증가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 금융硏 “금리 1%p 오르면 취약 차주 비중 20%로 상승”

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국면에서 부동산·주식 등 자산가격 조정이 맞물리면서 저소득층, 자영업자 등을 포함한 취약 차주와 한계기업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나라는 주택담보대출에서 변동금리대출 비중이 높기 때문에 금리 인상에 유독 취약하다.

올해 6월 기준 월 소득의 40% 이상을 빚 갚는 데 쓰는 취약 차주 비중은 전체 대출자의 18%에 달했다. 한국금융연구원 분석 결과, 금리가 1%포인트 상승하면 취약 차주 비중은 20.2%로 높아진다. 특히 주담대를 보유한 20대 취약차주 비중은 기존 27%에서 33.1%로 높아질 것이라고 추산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내년 초까지 긴축 행보를 이어가면서 이달 한국은행의 추가 금리인상도 기정사실화됐다. 한국은행이 오는 24일 열리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최소 0.25%포인트만 올려도 가계대출 금리는 8%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연구원의 분석대로 금리 상승으로 취약 차주가 늘어나고, 부동산 시장 경착륙과 함께 가계대출이 부실화될 경우 금융기관도 부실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서울 중구 남산에서 시내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가 보이고 있다. / 뉴스1

가계의 이자 상환 부담이 급증하면서 민간소비도 위축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주담대 금리가 현재의 절반 수준인 4%였던 지난해 4억원을 30년 만기로 빌린 가계가 매월 갚아야 했던 원리금은 191만원이었다. 주담대 금리가 8%로 상승하면 매월 내야 하는 돈은 294만원으로 100만원 이상 늘어난다. 주담대 금리가 9%로 높아지면 322만원까지 불어난다. 그만큼 가계의 소비 여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경제 전문가들은 가계부채가 이미 누증된 상황에서 급격하게 금리를 인상할 경우 금융불균형 완화의 긍정적인 효과보다 취약 차주의 부채 부실화와 소비 제약으로 인한 부작용이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에 취약 차주 지원 대책을 포함한 금리 인상 연착륙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형석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과도한 통화 긴축으로 경기 침체가 발생하지 않도록 세밀한 금리정책 운용이 필요하다”며 “정책당국은 가계부채 부실화 위험이 큰 저소득층, 청년층 가구의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지원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 가계부채는 디레버리징…채권시장 경색에 기업부채는 급증

올 들어 금리 인상과 주택거래 부진으로 가계대출 증가세는 주춤한 반면, 기업대출은 크게 증가했다. 최근 채권시장 경색으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기업들이 은행 대출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기 둔화에 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3고(高) 현상으로 기업의 경영 여건이 나빠지면서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하는 한계기업을 중심으로 기업의 줄도산이 본격화할 것이란 우려도 커졌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GDP 대비 가계부채 비중이 높다고 당장 경제 위기가 생긴다고 볼 수 없지만, 소비 여력이 줄어들면서 경제 성장률이 낮아질 가능성은 분명히 높아진다”며 “오히려 기업대출 증가 기조 속에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기업이 도산할 경우 은행도 부실화되면서 경제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